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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백승휴/백승휴관련 기사내용

내적자아를 찾아주는 영혼을 찍는 사진작가 - 백승휴 by 한국산문 김미원


 


몇년전 미국에서  마스터디그리수여식에 참여했을때의 사진이다. 겸허한 자세로 사진을 임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몸으로 체득한 날 것의 지혜들

언젠가 그의 스튜디오에서 인물 사진 찍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사자를 연상시키는 파마머리를 한 큰 얼굴, 형형한 독수리 눈빛을 가진 그가 망가진 표정을 지으며 카메라 앞에서 잔뜩 긴장한 사람들을 무장해제시켰다. 그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셔터를 눌렀다.

스튜디오 서가에는 그의 사진 작업의 깊이를 알 수 있게 하는 《여성심리》, 《컬쳐 코드》, 《미의 역사》, 《불안》, 《정신분석에로의 초대》, 《본다는 것의 의미》, 《여성의 몸》 등의 책이 꽂혀 있다.

밝은 색 옷을 즐겨입는 그는 체질적으로 평범한 것을 싫어한다. 학창시절 교복입고 단체 사진을 찍지 않았던 그는 사진작가가 되어서도 같은 모델을 놓고 여러 명이 사진 찍는 것을 되도록 하지 않는다.

“저는 남과 다르게 찍어야한다는 의무감을 가졌던 거 같아요. 지금도 제자와 동료들에게 스승을 배반하라고 얘기해요. 다른 것, 다른 길을 가라고요. 처음에 웨딩사진 찍을 때도 새벽에 명동 한복판에서 찍었어요. 나만의 색깔을 찾으려고. 미학적으로 사진을 배우진 않았지만, 감성적인 사진을 찍었어요. 덕분에 유명세를 타서 사람들이 줄 서서 예약했지요. 저는 사진은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워야한다는 주의였어요.” 그는 이런 것들을 대부분 몸으로 때우며 배웠다. 배운 걸 짜깁기 했다기보다 맨땅에 헤딩하면서 배운 거를 나중에 책으로 이해했다. “그 때는 이론이 몸에 찰싹 달라붙으면서 시멘트처럼 견고해지는 거죠. 살아오면서 저는 멘토가 따로 없었던 것 같아요. 혼자 고민하고, 결정하고, 코피나면 코피 닦고, 제가 볼 때 몸으로 맞으면서 슬기로움을 터득했던 거 같아요.”

사진을 찍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

지금은 운명이 된 사진과의 만남은 우연으로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진학을 위해 대천에서 올라와 기거한 서울 고모부집이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사진 기술을 익혔다.

안정적인 밥벌이를 위해서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겨우 졸업했다. “세 시간짜리 전공 강의동안 칠판을 바라보아야했던 시절을 통해 인생에 대한 인내력이 생긴 거죠(웃음). 그런데 사진 일을 도우면서 자기만족이 컸어요. 겉으론 강한 척 했지만 속은 약한 제가 사진을 찍어주면서 사람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어 좋았어요. 사진이 소통의 도구라는 걸 그때 알았어요. 아르바이트로 회갑연, 결혼식 사진 찍으며 돈 좀 만졌어요.(웃음) 용돈 쓰고 졸업할 때 통장에 2천만 원 있었으니까. 졸업 후 진로 문제로 고민할 때 직장다니는 선배들을 찾아갔는데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았어요. 물론 선배들이 나 행복하지 않아,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지만... 나는 사진 찍을 때 행복했거든요. 그 당시만 해도 너 대학 나오고도 ‘찍사’하려고 했냐는 소리 들을 때였죠. 결론을 내렸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 하자고. 쉽게 가는 게 아니라 나와 조우(遭遇) 하는 데 몸부림을 많이 쳤던거 같아요.”

그는 자신을 ‘내적 자아를 찾아주는 포토 테라피스트’라고 명명한다. 인물사진을 미학적으로라기보다 심리적으로 접근한 그가 포토 테라피(therapy-치료) 라는 영역을 찾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다른 사진가들이 미학적인 외면의 아름다운 사진을 추구할 때 나는 내면의 것, 찍히는 사람이 변화를 알게 해주는 것에 착안을 한 거죠. 사진을 통해서 마음의 평온을 찾아낼 수 있어요. 존 버거는 ‘눈으로 보여지는 것을 그냥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눈을 열고 마음을 열고, 보여지는 모든 것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라’고 하지요.”

한 때 인기강좌였던 백화점 문화센터 강의도 사진 잘 찍는 법이 아니라 잘 찍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수강생인 중년여성의 사진을 찍다보니 그들이 찍힌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몰랐던 아름다움, 나이들어 보이는 아름다움, 원숙함에 만족하며 사람이 바뀌는 모습을 보며 사진이 그 사람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포토 테라피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나는 테라피란 단어를 아로마, 미술, 원예, 음악 등 모든 것에 다 붙이는 풍조에 편승하는 게 아닌가라는 껄끄러운 질문을 했다.

“의사들은 의사 아닌 사람들이 테라피란 단어를 언급하지 말라고 하지만 120kg의 여자가 동기부여가 되어 운동을 하고 다이어트를 해서 변화된 모습을 사진으로 보고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면서 활력을 찾는 게 얼마나 좋은 거예요? 저는 의사들 영역을 침범할 생각은 없어요.”라고 분명하게 말을 한다.

25년간 인물사진을 찍어온 그가 정의하는 아름다움은 뭘까? “볼수록 끌리는 사람이 매력적인 거죠. 내적, 외적인 것이 합쳐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연예인들 외에는 성형 반대 입장이예요. 인형같은 얼굴은 10분이면 식상해요. 신이 만들어낼 때 그 사람에 맞게 포맷했잖아요. 제가 중년여성 사진 찍으면서 느낀 게 그 안에 아픔, 욕망, 좌절, 모든 게 다 있어서 사진 찍는 나를 안아주는 느낌이 들어요.”

인간은 누구나 고통의 질량은 똑같다

그는 지금까지 마음먹은대로, 말하는대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나는 너무 지나친 자신감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경험한 바로 그렇다는 거죠.(웃음) 그런데 실제로 내가 ‘내적자아를 찾아주는 포토 테라피스트’라고 하면 정말 내가 그런 것 같아요. 의무감도, 책임감도 더 느껴요. 부르면 부를수록 더 가까워지죠.(웃음)”

안하무인으로 살았다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그에게 자신감의 근원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자존감이죠. 또 고향 대천의 뒷산, 언덕, 바닷가, 우리 어머니의 맹목적인 아들에 대한 믿음, 화목한 부모님... 처음 서울에 와서 풍족하게 자란 아이들이 부럽지 않았어요. 저는 인간 누구나 고통의 질량은 똑같다는 개똥철학이 있었어요. 이 개똥철학이 탄탄해요.(웃음) 안하무인으로 살았던 거는 어머니의 역할이 컸겠죠. 일 더하기 일이 이라고 했을 때 나는 아니라고 나서서 말하지 않고 묵묵히 내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가는 거죠. 남들이 가지 말라 해도 그 길을 가서 아내가 고생 많이 했지요.”

풍경사진은 안 찍느냐고 묻자 그가 ‘통섭’이란 단어를 꺼냈다. “저는 풍경사진에도 인물을 넣어요. 인물 없는 풍경사진은 멋이 없어요. 저는 온통 사람에 관심 있어요. 풍경 속에 사람이 들어갔을 때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있어 이야기가 있는 사진이 좋아요.”

그는 미국 PPA 사진 명장이다. “너는 앞으로 사진 찍을 자격이 있다고 주는 자격증이예요. 사진가들이 도전해 보고 싶어하는 분야지요. 120여개국 사진가들이 미국 PPA(Professional Photograper of America)에 출품해서 일정 점수가 되면 받는 것입니다. 그 점수는 작품 점수와 봉사 점수가 포함됩니다. 사진을 잘 찍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됨까지도 점수에 포함되는 것이지요. 보통 7,8년 정도가 걸려요.”

그의 끊임없는 노력을 공중파에서도 알아주어 지난 봄에는 〈100일간의 기적〉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사진을 통해 6명의 여성에게 기적을 선물했다. 그의 실력과 방법이 검증되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고객이 많이 늘었겠다고 하자 공영방송에서 포토 테라피라는 장르가 소개되어 기쁘다고 했다.

35세 이후에야 제대로 책 읽기를 시작한 그는 서당훈장이셨던 증조부의 내림 탓일까, 강의가 재미있다고 했다. “보람도 있구요. 아무튼 나를 더 발전시키는 매력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강의를 통해서 나의 부족한 면을 인식하게 되니까요.” 그의 교수법은 몸으로 사진을 찍는 다양한 경험을 한 후에 이론을 가르치는 그가 체득한 방식이다. “제가 학생으로 공부하던 학교에 10년 만에 교수가 되었어요. 맨땅에 헤딩하면서 배웠던 것을 가르쳐 주는 거죠. 내가 목말랐던 것을.”

웃으면서 너무 좋아 침 질질 흘리면서 사진 찍는 모습이 떠올라요

대장간에 칼이 없다지만 그는 10년 전부터 매년 애교없는 딸과 아내와 애교많은 아들과 가족사진을 찍어왔다. 그는 돈키호테같은 삶을 살아왔지만 자신의 욕구 때문에 가족이 피해자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 튀는 기질을 아내가 방어했어요. 바람막이가 되어준 아내가 고맙죠. 아내가 없었으면 내가 지금처럼 자유롭지 않았겠죠. 그런데 아내는 좀처럼 나를 칭찬하지 않고, 비판하고, 쓴소리를 하는데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죠.(웃음)”

쉬는 날 없이 옆을 보지 않고 앞으로 달려왔다고 했다.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가능할까 할 정도로 그 때는 힘든지 몰랐는데 지금 돌아보면 어떻게 그렇게 살았나 싶어요. 엔진 시동이 걸려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요. 엔진이 꺼져있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뭔가를 극복하고, 했다는 게 중요하지요.” 나는 일 중독자라고 하자 “자존감이죠.” 라고 받았다. 엔진 과부하가 걸리지 않게 살살 하라고 하자, “엔진이 고장나면 수리점 갔다오면 되지요. 과로는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하니까 생기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죠.”라며 웃었다.

올 9월에 열릴 세계 장애인 기능 올림픽 지도위원으로 청각장애, 하반신 마비, 손도 제대로 못 쓰는 사람들에게 사진을 가르치고 있다. 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단다.

그는 왜 이렇게 앞으로 달려가는 걸까, 무엇을 향해 달려가는 걸까, 지향점이 궁금했다. “자유예요. 지금은 내 목표의 40%쯤 왔다 생각해요. 웃으면서 너무 좋아 침 질질 흘리면서 사진 찍는 모습이 떠올라요. 재미있어요. 행복해요...”

요즘은 디지털 카메라가 대중화되고 심지어 화소가 높은 휴대폰으로도 사진을 찍는 온 국민 사진가 시대이다. 그에게 사진을 잘 찍는 요령을 알려달라고 하자 “저는 사람의 사진을 찍을 때 사랑하는 애인을 찍듯이 최선을 다해 찍습니다.”라는 말로 대신했다.

4시간 가까이 이야기하고 헤어지는데 그가 ‘인터뷰 테라피’가 즐거웠다고 인사를 건넸다. 인터뷰이 뿐 아니라 인터뷰어도 치료가 된 느낌이었다.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는 기가 내게도 전이된 것 같았다.

그는 인터뷰 내내 ‘자존감’, ‘체득’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몸으로 체득한 날 것의 언어였다. ‘나와의 조우’라는 표현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나와의 조우를 향해 끊임없이 나가는 그를 보며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 나와의 조우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맨 땅에 헤딩한 세월이 결실을 맺기 시작하는 지금 그는 보여지는 것, 꾸미는 것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을 이미 체득했으니까...



대담 및 글 김미원(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