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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관련/가족사진

쌍둥이의 몸짓 속에 담긴 인생철학, 아기사진.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사진은 추억이다.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지금의 멋진 사진도 오랜 된 사진의 아우라를 이길 수 없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 100일, 돌을 기념하는 사진을 찍는다. 이 사진이 없다는 것은 인생에서 절차가 빠진 것과 같다. 일단 부모의 몫이다.  쌍둥이를 키우는 일은 안키워본 사람은 모른다. 그래서 나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안다. 한 놈 보다는 닮아 있는 두 놈을 찍는 것은 여간 재미난 일이 아니다. 난 이건만 안다. 

나는 아이들의 몸짓 속에서 삶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창살사이로 형제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표정만으로도 아이들의 성향을 분석할 수 있다. 의상의 대비와 표정의 차이점에 의해서도 아이들의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다. 마냥 즐거워하는 좌측아이와 관심어린 표정이 어른 스러워보이는 오른 쪽 아이가 있다. 이 아이들이 펼쳐갈 세상은 흥겨운 세상일 것이 확실하다. 한놈은 깔깔거리며 자신을 세상에 샤우팅을 하는가하면, 한놈은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는 눈빛을 하고 있다. 이 문장 안에 이 아이들의 성격이 완벽하게 구사되어 있다. 얼마나 신기한 이야기인가? 행동의 민첩성과 넓은 혜안은 쌍둥이에게는 각자의 성향이다. 인간이 둘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아기 하는 일 중에 제일 중요한 일이다. 먹는거, 맛보고 그 맛을 표현하는 것은 표정으로 나타난다. 신맛, 단맛, 쓴맛, 짠맛, 그 많은 미묘한 맛들을 아이들은 표정하나로 표현해 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둘이다. 찡그린 표정과 환한 미소로 말이다. 이렇게 세상은 단순하다. 아니 단순했다. 그런데 복잡하게 만든 것은 자신의 마음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담긴다. 이분법처럼 그 안에 표현미학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자아와 타자로 나눠지 듯. 맛을 본 후의 아이는 털떠름한 표정인 것이 그리 좋아하는 맛을 아닌듯 하다. 그러나 좌측의 아이는 아직 그 맛을 보지 않고 여유를 부리고 있다. 배부른 것이다. 그렇다. 인간에게 과다함이  병을 부르고 문제를 일으킨다. 배부르면 먹기를 거부하고, 배고프면 먹는 그 단순한 논리, 그러나 우리는 그 배부름의 과도함을 즐기며 살아왔다. 풍족함이 화를 불러 일으킨 것이다. 그 첫번째가 비만이다. 넘쳐나 있고, 그것이 만병의 원인이 아니던가? 이처럼 아이의 몸짓 하나에서도 우리들의 일상이나 세상사나 모두가 담겨 있다. 

몸짓은 일률적이다. 오무린 입술, 꼭쥔 손가락, 옹골찬 허벅지가 닮았다. 이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은 자유롭다. 그가 그 세상을 만들고 부수고를 자유롭게 한다. 아이에게 세상은 넓지 않다. 그가 가진 아직은 좁은 세상 속에서 자유자재로 주무르곤 한다. 아직도...


세상과 같다. 함께 있으나 생각과 행동은 다르다. 그냥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외롭지 않다. 아니 옆에 있기에 논다. 한가지를 같이 하더라도 사람들은 각지 다른 생각속에 빠져있다. 그냥 자기의 방식으로 그것을 즐기는 것이다. 책을 보는 듯, 바라보는 아이들은 책의 본능에 충실하지는 않는다. 그냥 만지작거리는 물건일뿐 그 안에 글자에는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냥 이들에게 책은 물건일 뿐이지 아직 그 지혜를 글 속에서 찾지 않는다. 그 자체를 느낄 뿐이다.

부모의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대단한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아이의 성향이다. 하나는 동적이며 날렵하고, 하나는 연약하고 정적이다. 그런 아이에게 맞는 차가움과 따스함의 색으로 구분지어놨다. 이럴경우에는 아이에게 다른 옷을 입혀서 그 아이에게 모자란 것을 채워주는 칼라테라피를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

부모는 아이의 웃는 얼굴을 원한다. 그러나 아이의 표정은 예쁘지 않을때가 없다. 몇일만에 변을 봤다면 손가락으로 찍어서라도 맛을 보고 싶어할 지경이다. 지금 이 아이는 상대와 소통하는 방법을 연습하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에게 자신이 슬프고, 싫어하고, 그러지 말라는 신호를 연습 말이다. 오른 쪽의 아이는 자신이 저지른 비행을 감추기라도 한듯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고 태연한 척한다. 그러나 당황한 표정이다. 옆의 아이가 우는 것은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한다. 머리를 한대 쥐어 박어놓고 말이다. 인간의 방어기법중에 뻔뻔함이다. 쌩까기!

자연의 색깔들은 묘하다. 물론 작가의 의도이다. 그러나 이렇게 완벽한 하모니까지 생각할 정도로 민첩하지 않다는 것을 나 스스로도 잘 안다. 그런데 의자에 칠해진 색감과 아이들의 의상, 그리고 백그라운드에 발라진 물감들의 하모니는 그냥 넘길 수가 없다. 너무 감동적이다. 발란스,  지구가 우주의 괘도에서 팅겨져 나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연은 자연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져서 그 안에서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만든다. 아이가 입고 있는 옷 색깔은 언급했지만 그들의 성향과 닮았다. 그러나 그들이 밀고 있는 의자 색깔고 다르다. 인간은 자신을 방어적으로 표현하는 것과 같다. 약한 사람이 자신을 비호하기 위해 강한 척하는 것처럼. 강자의 여유로움과 약자의 아닌척 강박스러움의 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