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백승휴 칼럼/Photo Essay

나에게 모나미 볼펜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였다. by 포토테라피스틑 백승휴

소유냐, 존재냐, 그것이 문제로다. 들판에 아름답게 핀 꽃을 바라보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산업화이후, 그것 조차도 돈으로 탈바꿈하면서 물물교환의 수단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피었다 지는 꽃을 사시사철 보고 픈 인간의 욕구가 들꽃을 화분에 담아 실내로 옮겨지게 되었다. 봄에 핀 꽃이 겨울에도 방안에서 웃음 짓고 있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를 모르는 인간의 엉뚱한 지식이 한 몫을 한 것이었다.

사진에 모나미 볼펜을 올려 놓고 꽃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 놓는다는 것이 이상할 지 모른다. 소유냐, 존재냐라는 논재를 끌어 들이기 위한 서막이었다. 꽃의 존재를 인정했을때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데 굳이 소유하려고 하면서 꽃이 주는 의미를 반감시키는 인간의 생각을 꼬집으며, 모나미 볼펜에 대한 나의 소회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누구나 징크스가 있다. 가지고 다니면 자주 사라지는 가슴 아픈 사연. 고가의 필기도구를 선물 받는다. 그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는 나를 만나 가엾은 삶을 마감한다. 그걸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필기도구 이상으로 활용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몸에 지니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옷만 걸치고 다닌다. 시계나 목걸이 내지는 모자도 착용하는 걸 번거롭게 여긴다.

페북에 올린 이 사진으로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소유와 존재'의 개념을 논했다. 소유하지 않는다는 말에 실용주의적 사고를 지녔다고 말했다. 그런 수준 높은 사고를 가진 것은 아니다. 나에게 모나미는 A4용지에 빽빽하게 글을 쓰며 암기했던 시절에 모나미 볼펜은 사치였다. 그래서 그 안에 심을 바꿔끼우면서 썼다. 그것도 지금처럼 정신머리 없이 그냥 가지고 다니다가 소모품의 일환으로 버리듯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재산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으며 리필한 심부분만 가지고 다녔다. 총알이었던 것이다. 볼펜의 외부는 분명 나의 소유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존재로 남아있다. 그것은 분명 나에게 집착처럼 중독증세를 보이고 있다. 향수같은 것도 존재한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향수를 더듬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모나미 볼펜 하나가 점심시간의 도시락, 수업시간의 잡담, 만원버스에서의 만나는 여학생에 대한 설렘, 야간자습시간의 억압, 입학식과 졸업식의 추억들, 그리고 반창회가 열리는 그 술판의 이야기와 담임선생님의 흰머리와 막걸리가 떠오르게 한다. 모나미 볼펜은 필기도구를 넘어서 있다. 내가 집착이 아니라 애착이라는 단어를 쓰며 소유가 아니 존재의 개념으로 그를 모셔두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공산품의 비희귀성에도 좀처럼 질리지 않는 그 존재적 담론은 예술가의 손때 묻은 간절함을 능가한다. 모나미 볼펜의 저가공세는 학창시절의 빈곤을 상기시킬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함으로써 몽블랑 만년필의 가치를 능가하는 존재를 부여한다. 어떤 싸인에도 과감하게 내 놓고 긁어댄다. 벤츠를 몰고, 라이카로 셔터를 누르는 가오가 아니라 모나미 볼펜은 나에게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   

값비싼 볼펜을 소장했을때 불편함을 넘어 사라져도 없어지지 않는 보통명사다운 기품, 소유에 대한 집착이 아닌 존재로 남아주는 배려가 모나미 볼펜의 매력이다. 한 귀퉁이 잡혀 있던 소유적 발상이 필기에 대한 자유로움으로 편안함을 준다. 나에게 모나미 볼펜은 소유되지 않는다. 단지 존재로의 위상을 가질 뿐이다. 하찮은 듯 보이지만 모나미 볼펜의 아우라는 존재로 남아 다양한 이야기를 남긴다.


나에게 모나미 볼펜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였다. by 포토테라피스틑 백승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