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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휴 칼럼/장소를 만나다

황순원의 소나기 마을, 짧은 여행의 단상.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새나라의 어린이가 아니고, 농부 근성 때문이다. 농부는 삽이고, 난 카메라다. 일어나면 일단 밖으로 나간다. 계획하지 않는다. 습관적이다. 답은 현장에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이 또 그렇고. 이러다보니 여행도 그렇다. 무계획을 즐긴다. 내 인생이 얼추 그렇다. 특히 우리 가족여행에서 가족들의 얼굴은 항상 <우거지 상> 이다. 여기는 황순원 소나기 마을 근처이다. 알고 온 건 아니고 오다보니 <소나기>란 팻말이 많이 눈에 띈다. 

잔잔한 냇물은 소리없이 흐른다. 잠자는 사람들이 깰새라 조심스럽게 흘러간다. 냇가의 바람이나 풀벌레, 심지어 새들까지도 조심스럽게 돌아다닌다. 고개숙인 꽃송이는 아직도 취침중이다. 해가 뜨면 고개를 번쩍 들고 거만한 자태를 뽐낼 것이다. 겸손과 거만의 이중주? 강아지 풀이 바람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 뒤로는 다리가 있다. 다리는 건너야 맛이다. 이 동네의 운치는 <건너야 하는 다리>에 있다.


슬슬 아침이 밝아온다. 구부러진 아스팔트 저편엔 정체 모를 뿌연 기운이 나의 시선을 끈다. 개집 앞의 개는 소소한 일상을 즐기며 나 보기를 <아래로> 본다. 개울 너머 작은 집에는 사다리 하나 놓았을 뿐인데 괜찮아 보인다. 얼기설기 전깃줄이나 안개 같은 것들, 동물이나 집들의 모습에서 이 동네의 모두는 자기 끼리의 삶을 즐기는 게 틀림없다. 그걸 알겠다.

오해와 진실, 그리고 가짜들의 세상. 길 가운데 세우진 팻말이 눈에 거슬린다. 길을 막은 이유를 묻기 위해 다가가니 이런 말이 써 있다. "미끄러우니 조심하세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얼마나 오해인지 생각하게 한다. 동네를 돌아 다니다 숙소로 돌아오니, <딱 걸렸다, 너!> 를 외치게 하는 순간이다. 워낙 가짜가 판을 치니 정원에 잠자리 까지도 가짜다. 엉뚱하고 태연하다. 워낙 세상이 그러니 <가짜 잠자리>를 탓할 수가 없다.


이 동네와 잘 어울리는 팬션이랄까. 자태를 뽐내지 않는 동네의 것, 것, 것들. 잘 보이지도 않는 곳에 소박한 팬션 하나, 메종드 씨엘. 홈페이지엔 거하게 치장한 공주풍의 실내 느낌과는 달리 안으로 들어가니 편안함을 준다. 주인 아주머니의 인심도 후하다. 깻잎으로 담은 물김치를 내어준다. 먹고나니 세상이 시원하다. 뭐든 꾸민 것보단 그대로를 보여주는 게 아름다움이 아닐까. 짧은 휴가, 소소한 아침을 맞이하는 기회를 준 이 날에 감사한다. 지금 창밖으론 소나기가 내리고 있다. 빗소리를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황순원의 소나기 마을, 짧은 여행의 단상.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