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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관련/백작가의 '작가만들기'교실

사진의 노출은 빵을 굽는 것과 같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탁상공론, 이론과 실제의 차이, 뭐 이런 말들이 사람을 현장으로 내몰곤한다. 체험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억으로 몸속에 저장된다. 수백 수레의 서적을 탐독하였다한들 실전에서 생겨나는 경우의 수를 예견하진 못한다, 수영선수에게 이론을 가르치고 물에 들어가게 하는 것보다 물속에 집어 넣어 스스로 물속에서 살아나는 법을 익히게 하는 게 나은 방법이 아닐까? 그게 바로 헤겔의 철학적 개념이다.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스튜디오에 취직하여 그들이 부딪히는 일은 하나 둘이 아니다. 인물사진을 예로 들면, 배운대로 찍었는데 고객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한다. 물론 원칙대로 찍었지만 미적 감각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다른지라 당연히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그러나 학교에서 그것까지 다 배울 수 없는 것이 문제점이다.

이 사진은 전형적인 노출의 개념으로 보면 잘못된 사진이다. 노출 오버와 언더의 전형이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을 끌어내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의 감정은 얼굴을 보지 않아도 어떤 상황일지 예견할 수 있다. 그리고 오른쪽 사진은 뒷모습이지만 몽환적이면서 뭔가 환희스런 느낌을 준다. 몸짓이 사람의 내면을 표현하듯 노출 또한 강력한 언어임에 틀림없다. 이 사진은 포토테라피강의를 수강하는 김수영씨의 작품이다. 나는 그녀의 사진을 통해 그녀의 감정의 변화를 예견하곤 한다. 

미술, 사진, 음악 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문들이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으나 논리적 개념으로 풀어가면 별반 다르지 않다. 같은 악보를 연주하더라도 그 소리가 전부 똑같을 수 없다. 키워드를 던져주고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라고 하더라도 똑같은 그림은 평생을 그려도 얻지 못하는 원리와 같다. 사진도 그렇다. 그중에서도 나는 노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노출을 측정하는 도구를 노출계라고 한다. 정확한 노출을 측정한다는 기계다. 그러나 빛이 비춰지는 어느 정도의 기준일 뿐이지 노출에 대한 정답은 아니다. 존시스템을 논하며 그것을 정확하게 찍어야  공감하던 과거, 필름을 현상소에 맡기고 몇십분 내지는 몇일을 기다리며 적당량의 노출을 기대하곤 했다. 그러나 디지털이 존시스템이나 노출에 대한 아우라를 무너뜨렸다. 

적정노출은 없다. 이유는 노출을 만드는 빛이 그 정도에 따라서 다른 언어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데도 밝은 사진은 기분이 좋은 것으로 인식되고, 어두운 느낌은 왠지 우울한 기분이 든다. 여기에서 밝은 노출은 노출계의 기준보다 노출이 오버된 것을 말하며 어두운 느낌은 그 정반대의 경우이다. 음식에는 누릉지처럼 바싹 태워야 제맛이고, 생선회처럼 날것으로 먹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노출도 다양하게 자기에 입맛에 맞게 조절하여 찍으면 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결론적으로 최상의 노출은 없다. 단지 의도한 노출만이 존재할 뿐이다.  사진이 소통하는 도구임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근거임에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야한 얘기하나 하자. 노출이라고 하면 여자의 비키니를 떠올릴 수도 있어서 하는 말이다. 무조건 노출해야 섹시한가? 홀딱 벗어도 감이 안오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긴치마에 옆이 살짝 트인 것이 더 야하지 않은가? 


(사진의 노출은 빵을 굽는 것과 같다.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