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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관련/백작가의 '작가만들기'교실

몬드리안의 팔레트, 사진가 박승직의 illusion.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착각도 자유셔!"

라며 상대의 말을 비웃으며 착각을 업신여기고 있다. 인간에게는 생각의 자유가 있고, 그 착각이 결코 부정적으로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 착각때문에 현재를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대부분 착각일 수 있다. 착각이 '잘못'이라는 그릇된 비유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현실이 환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처럼, 착각도 자기집착적 의미에서 반듯이 일상에서 조미료처럼 활용되어져야 한다.

사진가 박승직이 찍어낸 몬드리안의 팔레트, 환영(illusion)

반영은 상상을 자극한다. 외곡된 자극이 시각을 혼돈으로 몰어 넣으며 창작적 동의를 일으킨다. 박승직의 사진에는 그가 있다. 악기의 형상처럼, 악보의 리듬처럼 환영을 불러 들이고 있다. 나는 이 사진 속에서 몬드리안을 만났다. 빨노파와 검정 그리고  하얀색이 어우러진 몬드리안의 형이상학을 쫓고 있다. 빨강, 노랑, 파랑은 세상을 완성하는 원동력이다. 또한 검정과 흰색은 무와 유를 의미하며 세상을 구성한다. 박승직은 알고 있다. 존재가 존재하는 방식을. 몬드리안의 그림에서만 보여주는 면과 선의 합체를 박승직은 느슨하게 해체된 듯한 영상으로 몬드리안과 다른 방식으로 우주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분명 화가와 사진가의 차이일 것이다.

몬드리안의 구성주의를 분리시켜 낱개처럼 보이도록 착각에 빠트리고 있다. 화가 몬드리안의 물감처럼 그가 필요한 물감들로 구성해 놓은 팔레트가 연상된다. 작품의 완성이 아닌 시작점을 의미한다. 아낙이 샘물에 물을 퍼가듯, 몬드리안은 이 팔레트 안의 물감으로 자신만의 염원을 그려낸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자연에서 추출한 색감은 언제나 있었고 언제까지나 존재하는 것이다. 화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무궁무진한 원천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 물감은 무한상상을 제공하고 있다. 

박승직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다. 파랑을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빨강은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영역인 열정을 무의식으로 분류했다. 의식적으로 그는 노랑을 환희로 표현하며 절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보이는 이 노랑은 그의 성향이 담겨졌다. 말이 없고 수줍은 듯 보이는 그의 절제하는 생활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의식적으로 즐거움을 표현하지 않는다. 환희의 상징, 고흐가 갈망했던 노랑의 색깔은 그의 소심함에서 자신에게 다가온 기쁨까지도 밀어낸다. 이 사진은 그를 그보다도 더 잘 말해주고 있다.  가능성이 있고, 사진에 대한 열정을 확인한 박승직은 이제 노랑의 웃음을 지을 수 있다. 파랑과 빨강이 그것을 담보할 것이다.

울릉도의 낯선 항구는 박승직에게 도약의 지점이었으며, 아트에 대한 뮤즈를 만난 곳이기도 하다. 이제 낯선 '다름'에 대한 갈구를 통하여 박승직 스스로를 환영의 영상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검은 선으로 중심을 잡은, 가끔은 끊긴 그 지점은 삶의 리듬감처럼 강약의 대비를 통해 에너지를 보충하는 의미라고 봐야할 것이다. 멀리서 바라본 이 작품에서 바이올린을 든 천제 아티스트 정경화의 몸짓이 환영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존의 완벽을 이제는 원숙한 여유로움으로 세상과 조우하는 형상이 보였음이었을까? 강함은 유연함을 끝내 이기지 못하는 진리를 말하기라도 하듯.


몬드리안의 색에는 모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빨강, 노랑, 파랑이 말하는 색의 원형과 흑백이 보여주는 시작과 끝. 그가 생각했던 상황과 내가 바라보는 의미는 다를 수 있으나 다름을 생각했던, 그 당시 사진이 그의 창작적 의지를 굳게 만들었던 의미에서 지금의 박승직이 욕구하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형상을 구성주의적 발상으로 표현하며 내면을 보여줬던 몬드리안, 카메라를 통해 찾고자 했던 수많은 영상들 중에서 그가 만났던 것에 희열을 느꼈던 박승직, 그 둘은 서로에게 의미하는 의미의 공감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박승직은 있는 것을 찍은 것이 아닌 그가 창작해낸 세상과이 조우를 갈망하며 있을 수 있는 세상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이다.


아마, 그는 지금 현실이 아닌 환영의 삶을 살아간다고 믿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