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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휴 칼럼/Photo Essay

아침을 맞는 자세, 능내역에서 양수리까지.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아침은 신선하다. 새롭다. 사실, 어제의 연장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새롭게 규정한다. 새로운 아침이라고. 밤 12시를 기점으로 다른 날이라고 정해 놓고, 새로움이라는 어휘에 의하여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뻔한 매일 매일을 같은 것이거나 그것의 연장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축처진 어깨로 날들을 보내야 할 것이다. 

이른 새벽, 셔터소리가 세상을 깨우고 있었다. 하루를 일찍 시작한다는 것은 긴하루를 선사받게 된다. 온 세상이 나의 독차지인 것이다. 새들과 물고기기들의 인사를 들으며, 아침 이슬의 잔잔함과 안개의 신비스러움도 가끔은 접할 수 있다. 아침이 밝아 오는 빛이 리듬감으로 보인다. 세상이 나를 위해 오케스트라를 연주한다. 천재 음악가로 변신한 나는 직접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영화, 어거스트 러쉬의 꼬마 주인공이 느꼈던 감성을 체득할 수 있다. 사진은 노출을 보강하기 위해 삼각대를 이용하며, 인간이 혼자 전부를 할 수 없음도 깨닫는다. 그것은 단지 도구로써가 아니라 협업의 의미로 포괄한다.

아침은 바깥에서 안으로 스며든다. 멀리에는 하얀 습자지처럼, 곱게 옷을 입고 들어온다. 나는 그를 마중나가기에 급급하다. 어둠에서 밝음으로 향하는 것은 비겁한 것이나, 때로는 관음처럼 그것을 즐기는 것도 나쁘진 않다. 밀물이 들어오듯 아침은 어김없이 모두에게 다가온다.

양수리하면 안개다. 자욱할 필요는 없다. 조금의 안개라도 안개는 안개다. 풍요 속의 빈곤이란 그 풍성함을 즐기지 못함을 의미하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작은 것도 크게 느끼며 긍정의 표정으로 바라보며 대하기만 하면 된다. 그 다음 안개는 정겹게 다가온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익숙한 아침 풍광 속에는 행위자 한 사람이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셔터를 연신 눌러댄다. 그 광광은 물 속에 반영된 자태보다도 시선을 끈다.  

아침을 맞이하는 연꽃이 잠에서 깨어나 인사하고 있다.

이른 아침은 빛이 부족하다. 부족함은 풍족함을 가르친다. 과유불급이라, 정오의 풍성함보다는 이른 아침의 노출 부족이 더 매력적이다. 카메라는 삼각대 위에서 둥지를 틀어야 한다. 그에게 의지하면 감도 100으로도 당당히 세상과 맞설 수 있다. 렌즈는 실눈을 뜨고도 풍요롭게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다. 셔터는 어떤가? 오랜 시간, 빛을 담아내도 끄떡없다. 바람이라도 살짝 불어와 풀잎의 움직임이 프레임 안에  담길때면 색다른 질감을 맛볼 수 있다. 

강가에 핀 흰색 찔래꽃?인가보다. 이름 아침의 청초함이란 자태는 아침이어서 더욱 그 순백을 자랑한다. 건너편의 아카시아 향기가 강을 건너고 있다. 이렇게 아침은 상대에게 말을 건내며 일과를 시작한다.

쓸데 없는 짓을 했다. 장소는 양수리. 카메라 렌즈에 휠터를 끼고 장노출을 할 요량으로 삼각대를 어깨에 들춰 맸다. 결과는 비슷한데 애써 장노출을 의도한 것은 남들이 자주하는 그것을 따라하기 하려는 의도였나 보다. 'different'를 주장하던 나도 별 수 없나 보다. 그렇게 나의 호기심은 따라하기까지 접근하고 있다. 겹작약의 품격은 양수리를 아침을 밝히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찍었던 양수리의 아침, 목화꽃처럼 피어오르던 하얀 안개를 감동적으로 느끼지는 못했지만, 애써 스스로에게 감정의 마중물을 불어 넣으며 조금이라도 자족하며 셔터를 누르는 대견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삶에 감사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싶다. 누구나 아침을 맞는다. 어떤 아침이길 기대할 필요도 없다. 어떤 아침이든 '화들짝' 인사하고 서로에게 기쁨을 안겨주면 된다. 보이지 않는 것도 보려는 마음만 있으면 더 많은 것과의 조우가 가능하다. 세상에는 원하는 것들이 널려있다. 그것을 맞이할 넓은 가슴만 있으면 된다.


우리에게 아침은, 능내역에서 양수리까지.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