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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관련/백작가의 '작가만들기'교실

관심, 바라봄에 정의가 필요하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관심은 볼 관, 마음 심으로 구성된다. 두 글자를 합하여 해석하면 '마음을 보다'와 '마음으로 보다'로 나뉜다. 일단 사전적 의미는 뒤로하고, 액면 나타난 것에서 시작한다. 이외에 바라보다의 정의에 (그냥) 바라보다라는 문제아가 나온다. 그럼 차근 차근 덤벼볼까나...

세상은 사물들의 아우성으로 항상 시끄럽다. 작렬하는 태양과 맞서 분수대의 물소리와 자태가 심상찮다. 음악에 맞춰 춤이라도 추는 듯, 리듬감이 프레임 속에 담긴다.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라던 성철스님의 말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서로를 말하려는 듯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물론 이곳은 이테리의 밀라노, 말이 통하지 않아 그들의 아우성을 알아 먹을 수가 없었다.

먼저 기타부터 말하자면, (그냥) 바라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바라보는 것은 다양한 종류가 있겠지만 '그냥'이란 목적성이 없는 상황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때는 바야흐로 나의 대학시절 강의장으로 간다. 나는 전자공학과를 들어갔다. 물론 적성을 고려하지 않은 상황에서 전공수업 3시간은 (그냥) 바라보는 시간이었다. 수업시간의 칠판은 녹색이며, 글자는 흰색, 그리고 설명하는 교수는 그냥 사람일 뿐 어떤 의미도 나에게는 없었다. 그 시절 나는 인내를 배웠다. 그리고 최고의 고문 중에 '벽 봐!'가 있다. 아무런 문양도 없는 벽을 본다는 것은 거울처럼 반사되어 인간의 머릿속에 무로 채워 넣는다. 아마 일주일이면 충분히 정신병에 걸릴 것이다.

(그냥)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권태를 조장한다. 쇼펜 하우어가 말했던 '삶은 고통'이라는 전제에 속한다. 권태는 일상을 (그냥) 바라보는 것이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아닌 매일 보는 뻔한, 반복되는 일상이라는 것이다. 이보다 더 고통스런 삶이 어디 있겠는가? '바라보는'이란 행위 앞에 그냥이란 무의미함은 인간성을 말살하고도 남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라보란 말인가?

여기에 '관심'이란 단어를 먼저 제시한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마음으로 바라보느냐, 마음을 바라보느냐의 선택적 기로에 선다. 우선 마음을 바라본다라는 말은 영험한 분께서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열길 물속보다 더 어려운 한길 사람의 마음을 어찌 영험하다는 수식어만으로 가능하겠는가. 오해의 소지가 많은 마음을 바라보는 것에는 서로에게 갈등을 조장할 수 밖에 없다. 내 마음도 모르는데 어찌 상대의 마음을 읽겠는가. 바로 이런 대답이 나온다. '너나 잘해라!'. 그렇다면 바라보다의 의미에서 가장 하일라이트는 마음으로 바라보다이다. 방법이다.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은 지향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식하는 것이자, 존재를 발견하는 것이다.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에게 바라봄에 대한 조건이 하나 생겼다. 그것은 마음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바라봄, 이것은 항상 '마음으로'라는 전제 조건을 갖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바라보다라는 말에는 그냥도 아닌, 마음을 바라보는 것도 아닌 주체자가 내가 되어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만이 진정한 의미의 바라보기가 되는 것이다. 눈은 바라보지만 카메라는 찍어낸다. 마음으로 찍어내는 것이야 말로 마음을 담은 멋진 작품이 완성됨을 의미한다.


관심, 바라봄에 정의가 필요하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