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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휴 칼럼/Photo Essay

곤지왕이 차려준 밥상을 찍다.(곤지대왕 일루전)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올림픽공원의 한성 백제 박물관에 가면 왕이 아닌데도 곤지왕이라는 이름이 연혁 속에 담겨있다. 이건 무슨 조화인가? 일본사기에 곤지왕이라는 문장하나가 사람들이 시선을 받았고, 신사에서 그 역사성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곤지대왕의 저자 정재수작가는 말이 없는 사람이다. 수줍은 듯 말이 없다가도 곤지대왕이란 말만 나오면 말수가 많아진다. 그리고 양형은 박사는 곤지왕의 내림을 받은 사람처럼, 마치 무당의 그것처럼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기운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시작한 곤지왕 네트워크는 계속 진행중이다. 거기에 곤지대왕 프로젝트가 사진가들이 동참하면서 프레임 속에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드디어 송파구의 지원으로 전시회가 이루어졌다.  도록이 제작되어 곤지대왕의 이야기가 수록되고, 전시장에 작가 11인이 펼치는 다양한 시각의 이미지들이 놓여지게 되었다. 누구는 의아해할 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과정을  보아왔기에 그것의 대단함을 안다. 무의 바탕위에 유가 생성되어지는 과정을 본다는 것의 의미랄까. 우리의 생각에서 지워졌던  1500년전의 환영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을 이어갈, 정치적 소용돌이에도 불구하고 민의 의지에 의해 공감되어지길 기대한다. 그 의지가 결과를 떠나 초심에 집중하고자 한다. 결과는 언젠가는 결실을 맺을 수 있기때문이다. 선생인 나는 작가들에게 곤지왕이란 키워드를 던져주고 그들 안에서 떠 오르는 감정을 형상화하는 방법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과정이다.  '물고기 잡는 법'의 의미다. 곤지왕은 나에게 자신과의 공감을 이끄는가하면 사진가들에게 영감을 전달하는 과정까지 모두를 준 것이다. 융합이다. 그 융합은 더하기와는 다르다. 더하기는 단순한 액면의 합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융합은 또 다른 것의 탄생이 추가적으로 제공된다. 삶 속의 관계가 그렇듯, 문화가 주는 유희를 맛보는 것이다. '또 다른 나"처럼 진정 다른 것과의 만남이다.  그 원형은 변함이 없으나 시선에 의해서 다양화되는 환영같은 것들이다.

오후의 노랑이 나름함이 아닌 열정을 보여준다. 그것은 붉은 기운이 포함되면서 강력함을 갖는다. 곤지대왕의 의지처럼 작가들의 환영은 예정된 만남을 보여주고 있다.


곱슬머리가 복잡한 내 머릿 속을 연상시킨다. 무슨 생각에 잠긴 것일까? 의미없는 단순한 바라봄인가, 아니면  다른 생각에 덫붙여진 현실의 직시인가. 사진은 무의미한 것은 없으며 상대의 생각을 움직이는 동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나를 바라보면서 그 사진이 주는 메시지를 재구성하고 있다.

전시장안으로 일본 합창단들이 곤지대왕 일루전 작품들을 감상하고 있다. 그들은 또 사진을 접하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생각을 조정할 수는 없지만, 긍정의 메시지들로 가득차있으리란 추측을 해본다. 긍정, 그것은 세상을 밝게 비추는 빛이다.

이 사진에서 정연호작가는 나의 작품을 골라냈다. 나를 위한 배려, 그것은 서로의 관계에 신뢰를 주는 매개물로 존재할 것으로 기대한다. 사진을 찍고 그것을 포장하고, 프레임 사이로 비춰지는 또 다른 영상은 원작자인 나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수많은 생각과 함께 그때 그곳으로 나를 인도한다.

송파구는  문화적 잉태를 시도하고 있다. 올림픽 공원이라는 공간의 우월성이 송파구의 의지를 더욱 독려하고 있다. 아직도 진행중이다. 한성백제의 기억들이 아직도 그 자태를 드러내지 못했음이다. 몇백년의 행위가 몇십년의 더듬이로는 그것을 충당할 수는 없는 일이다. 유난히 올림픽공원의 위상이 숭고로 격상된 한해로 나에게 기억시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