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사각의 프레임 안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작업이다. 지향하는 것을 찍어내는 것이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지향할 때 비로소 그 대상을 인식한다. 모든 대상은 지향성 없이 의식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앞서 존재하는 모든 대상들을 지향하고 있으며, 그 대상이 우리의 의식 안에 작용하는 것이다. 현상학적 관점은 어떻게 우리 의식에서 정신작용을 하는 것인지를 밝히려는 것이다. 따라서 사진 찍기의 모든 행위는 지향성에 작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해석학이며, 이를 통해 사진과 글을 분석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앞에 이미 앞서 있는 대상은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모든 대상은 스스로 은폐시키고 있다. 우리 앞에 그렇게 그러한 모습으로 다가 서있지만, 대상은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지 않는다. 단지 시각적인 형상만을 보여줄 뿐이다. 사진을 찍는 행위는 시각적으로 단순히 빛에 나타난 피사체의 실체를 모사하는 것이거나 혹은 자신의 방식으로 변형시키는 조작적 행위가 아니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피사체가 우리의 의식 안에서 작용하는 방식을 현상학적 시각으로 드러내는 작업이다. 현상학적 관점에서 사진은 피사체를 찍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스스로 은폐시킨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촬영자는 중년의 가정주부이며, 초보 사진가이다. 사진과 글에는 그의 현재가 담겨있다.
촬영자는 왕릉 안에서 옛 실내의 흔적들을 카메라에 담아내려고 하였다. 촬영자는 고분의 한 면을 배경으로 하고 전등을 찍었다. 그런데 전혀 다른 형상이 만들어졌다. 어두운 고궁의 실내를 배경으로 실내를 밝히는 전등이 겹쳐 전혀 다른 형상으로 찍혔다. 촬영자는 자신의 의도와 의지와 상관없이 찍힌 형상에 대해 의미를 부여했다.
"제목을 청동씨앗이라고 붙였어요. 1500년이란 시간을 버티려면 튼튼한 껍질이 필요하잖아요. 불이 켜진 전등은 발화하게 될 씨앗의 눈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렸다가 이제 새싹이 돋아날 것이란 의미에서 찍었어요. “
촬영자는 자신이 찍은 사진에 '청동 씨앗'이라고 의미부여를 했다. 촬영자가 대상을 찍었을 때 촬영자의 의미부여에 따라 본래의 모습의 형태는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가 꽃을 지향할 때 비로소 꽃이 의식된다. 김춘수 시인의 ‘꽃’은 ‘꽃'이라 불렀기에 꽃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 앞에 있는 그 대상은 어디까지나 촬영자의 의미부여에 의해 그렇게 존재한다. 촬영자는 자신이 “씨앗”이라고 의미를 부여했지만, 그 배경에는 불안이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청동을 의미부여한 형태는 씨앗을 보호하는 여성의 자궁이다. 자궁 안에 있는 씨앗은 생명이자 존재자이다. 씨앗은 불안으로 상징되는 검정색의 배경에 갇혀 있다. 촬영자는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의 심리적 불안을 지니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다.
무엇엔가 틀 안에 갇혀 있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의 의식은 “불안”으로 작용하게 된다. 촬영자는 자신의 삶이 무엇엔가 갇혀 있다고 가정했고 새로운 삶을 염원했다. 그러나 자신이 왜 그렇게 처해져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 삶을 벗어날 수 있는지를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촬영자의 의식은 “불안”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촬영자는 자신을 열어 밝히지 못한 채 알 수 없는 불안을 경험하고 있다.
“열어 밝히지 못할 때 불안은 우리 안에 항상 내재한다. 불안 속에서 주위 세계적인 손안의 것이, 세계 내부적인 존재자 전체가 가라앉아 버린다. “세계”는 더 이상 아무것도 제공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타인들의 더불어 있음도 그렇다(이상기, 2001. 256). “
불안은 결핍과 과욕으로부터 온다. 물론 과욕도 결핍의 일종이다. 갇혀 있음은 분명한 자유에 대한 결핍이다.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몰입과 비움에 있다.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저서, <불안>에서 원인과 해법을 논한 바 있다. 또한 불안의 속성 중에 하나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고 하는 성향이다. 다시 말해 불안은 그 불안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고 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불안을 가질 때 그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한다. 불안은 자유로움을 이끌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안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 의해 그 불안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이때 불안과 자유로움의 관계는 파괴되며 불안은 여전히 불안으로 남아 있게 된다. 촬영자는 자신의 자유로운 삶을 살아오지 못했다. 대신에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자유와 삶은 어두운 그들에 묻혀 있어야만 했다. 자신의 존재와 상관없이 살아온 사람이었다. 항상 남편의 그늘과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해왔다. 그것은 지루한 일상이기도 했다. 촬영자는 가정이라는 굴레에 쌓여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 아쉬움을 종종 토로하였다. 자신의 존재와 아무런 관련이 없이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위해서 살아오지 못한 촬영자는 스스로 그러한 사실들을 은폐 시켰다. 그러나 은폐된 존재는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 존재의 언어를 들어야만 한다. “드러냄” 들음으로써 가능해진다. 자신의 존재를 은폐시킨 것으로부터 드러내기 위해서 은폐된 존재의 언어를 들었을 때 비로소 은폐된 존재는 따르게 되고 존재를 드러낸다. 그리고 촬영의 결과 들음으로써 은폐된 존재가 “씨앗”으로 들어내었다.
촬영자는 사진 찍기를 통하여 자신의 본질적 의미인 “씨앗”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의미부여”이자 동시에 “들음”이다. “씨앗”은 촬영자의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정신형상이다. 여기서 씨앗은 생명이다. 신체에서 씨앗은 여성의 자궁에서 생명으로 자라난다. 자궁은 새 생명의 시작이며 탄생을 의미한다.
실제로 의식 안에서 오랜 세월 가정주부로서의 삶을 살았던 촬영자는 새로운 삶을 갈망하고 있다. 현재까지 가정이라는 견고한 틀 안에 갇혀있던 나에서 이제는 새로운 나를 만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두꺼운 청동껍질은 촬영자의 과거이며 살아온 세월이다. 마치 불 켜진 환한 전등과 같은 씨눈은 현재이며 탄생을 염원하는 자신의 강력한 의지이다. 촬영자는 자유로운 세상과의 만남을 준비하며 넓은 세상 속으로 향하고 있다. 따뜻한 색감은 자신의 마음이며, 검정색 배경은 새로운 생명과 삶을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촬영자는 “의미부여”와 “들음”을 통해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현재 겪고 있는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이제는 카메라를 통해 다시 세상을 만나고 있다.
사진은 사람들에게 사진 찍기를 통해 자신을 들어냄으로써,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것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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