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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휴 칼럼/Photo Essay

다비드의 엉덩이에 미켈란 젤로가 보인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체험이란 실체적 경험을 말하며, 현장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우피치 미술관에서 수많은 그림들을 봤다. 방탄유리가 끼워진 순서에 따라서 유명도의 기준이 정해지 듯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비롯한 몇 작품들이 크기에 상관없이 방탄 유리속에 고이 모셔져 있었고,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에서 느껴지는 아우라는 가슴 깊숙히 젖어 들었다. 나는 작품을 직접 찍지 않았다. 구경하는 사람들을 넣어 작품의 크기와 현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작품도 사람이,  그 풍경도 사람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인물사진가의 고집이다.

성당은 겉과 다르게 내부에 치장한 모습들은 가히 공격적이었다. 믿어야 믿을 수 있는 종교적 신념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성당의 벽화 속에 숨겨 놓고 평온을 소망하고 있었다. 뉴욕의 예술이 그렇듯, 예술이 소통의 도구만이 아닌 과시와 관계의 통로임을 이테리 예술이 보여주고 있었다. 돈이 권력을 사고, 그 권력은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데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성당의 높이 만큼이나, 성화와 조각들 그리고 건축의 완성도에서 삶의 부피를 보여주고 있었다.


작가의 치열한 창작과정만큼이나 그 작품들을 지켜내기 위한 후예들의 몸부림이 치열했다. 그 단상 위에 지금 그들은 예술의 기본 의미에 충실하게 삶에서 함께 하고 있었다. 에술은 완성이 아닌 진행형임을 길가에서 연주하는 악사의 몸짓에서도, 성당과 미술관의 전시장에서도 그 여운이 남아 있었다. 역사 속의 행위와 현재의 관객이 나누는 화려한 미사어구는 마침표를 찍을 수 없다.

아카데미아 미술관, 미켈란 젤로의 다빈치의 엉덩이를 본적이 있는가? 사람들은 앞모습으로만 다빈치를 말한다. 철저하게 계획된 디자인, 보이지 않는 곳까지도 철저하게 해부학적으로 완성한 미켈란젤로의 장인정신이 보였다. 12m 위에 세워질 것을 고려하여 큰 머리를, 돌팔매에 강한 팔뚝을 그렸다. 관람객들의 일부는 뒤에서 다빈치에 엉덩이의 매력에 빠져 있었다. 벗었지만 당당한 그의 늠름한 자세은 가히 남성들의 자존을 지켜주고 있었다.

다비드상을 보면서 얼마나 미켈란 젤로가 치열하게 자기와의 싸움을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12m위에 놓일 조각상을 올려다 보는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한 균형미와 앞이 아닌 뒤테에 대한 완성도에서 진정한 장인으로의 자기관리르 엿볼 수 있었다. 인간의 내면을 파악하는데는 정면이 아니라 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당당하게 돌팔매질을 하고 있는 다비드의 뒷모습에서 예술가로서의 미켈란젤로가 보였다. 창작이란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이는 하이에나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자신에게서 끄집어 낸다는 사실을 느끼며 미켈란 젤로와 헤어졌다.


다비드의 엉덩이에 미켈란 젤로가 보인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