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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휴 칼럼/Photo Essay

탈북 학생들, 나와의 소통을 위한 사진 찍기.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탈북 학생들, 나와의 소통을 위한 사진 찍기.

세상 사람들이 아픈가 보다. 어떤 단어든 테라피를 붙이면 말이 된다. 미술과 음악 뿐만 아니라 음식, 향기 모든 것들이 테라피의 소재가 된다. 특히 포토 테라피는 낯선 단어이지만 금방 익숙해 진다. 누구나 찍는 사진으로 힐링을 받을 있다는 기대는 염원처럼 거대해 지고 있다. 탈북 청소년들을 만났다. 나는 탈북이란 단어가 낯설었고, 그들은 나를 비롯한 대한민국 전체에 낯선 표정이었다. 사진은 그들에게 세상과 소통하는 도구였다.

아이들은 엄마같은 멘토를 만났다. 단체사진 속의 그들은 멘토의 얼굴을 감싸주고 있었다.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아이들로부터 위안을 삼을 수 있다는 의미를 부여하고자 취한 포즈였다. 서서히 함께 사진을 찍으며 대화는 무르익어갔다. 이들은 주고 받는 사이가 아니라 서로를 위한 소통과 공감의 대상이었다. 모두가 웃었다. 이런 웃는 세상을 위하여 화이팅!

모두는 정동진에서 삼양목장으로 향했다. 사진이 자연스럽지 않다. 맞다, 연출한 것이다. 학생들이 세상과 맞서 당당하게 살아가라는 의도에서 찍은 컷이다. 사진찍기는 주객이 따로 없다. 모두가 주인공이다. 사진의 주인공은 찍은 사람과 찍힌 사람 모두이다. 이건 누구에게나 혜택을 주는 일이다. 카메라 앞이라면 당당하게 웃을 수도, 기분 좋게 어떤 포즈도 취할 있다. 분명 카메라는 서로를 하나로 묶는 도구임에 틀림없다. 참말로 매력적이다.

마을에서의 어슬렁거림, 공원 둘러보기, 밤기차로 동해를.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지금도 아른거린다. 멘토가 빌려준 카메라로 찍었던 멋진 사진들까지 모두가 그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낯섦과 불안이 점점 익숙함과 평온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사진은 현재를 찍는다. 자신을 찍는다. 이런 체험만이 의식을 변화시킬 있다.

탈북학생들이 준비한 전시장의 작품들이다. 국회에 본격적으로 전시하기 전에 마을 어르신들을 위한 잔칫날 공간에 펼쳐진 작품들이다. 그들이 더불어 함께 함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다음은 <탈북학생 전시, 나도 사진작가> 전이었다. 국회에서 열렸다. 사람들은 학생들이 찍은 사진이 맞냐고 물었다. 전국민 사진작가시대, 그들도 작가가 되었다.

인간의 눈은 밖을 바라본다. 종착지는 내면 깊은 곳을 향한다. 안에 존재하는 자신을 만나는 것이다. 사진 찍기는 나를 만나는 것이고, 멘토와 나는 동행하는 일을 했던 것이다. 사진을 가르칠 있지만, 나를 만나는 방법은 가르칠 없다. 방법은 누군가의 도움으론 불가능하다. 스스로가 찾아가는 것이다. 사진찍기, 전시하기, 사진으로 소통하기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낯선 곳에서 흔들렸던 자아를 찾아주는 것이다.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정의한다면 <나를 찾아가는 >이라고 해야 맞다.

전시장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사진을 <작품>이라 불렀다. 이제 그들은 자신을 존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종이 장으로 봤던 그들이 스스로 찍은 사진을 작품으로 인지했다는 의미 있는 일이다. 이제 그들은 작가가 되었다. 그들 스스로를 멋지게 만들어내는.

탈북 학생들, 나와의 소통을 위한 사진 찍기.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