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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휴 칼럼/Photo Essay

사진 속에 나타난 <어떤 깨달음>.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나는 본 블로그에서 <어떤>이란 관형사를 자주 쓸 것이다. 확신할 수 없는  무엇에 대한 물음 때문이다. 그 물음은 물론 나 자신에 대한 것일 것이다. 나의 글에서 <...것일 것이다> 란 말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번 글에선 자주 사용될 것이다. 세상의 어떤 것들이 우리에게 확신을 주거나 메시지를 던져 주는 것이 있는 듯하다. 제목을 <어떤 깨달음>이라고 정해 놓고 스스로에게 확신 시키고 있다. 확실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확신시켜 믿고 싶은 걸 것이다. 사진을 찍으며 데자뷰와 같은 상황과 마주하거나 이럴 것이란 생각의 깨달음 같은 것을 경험하곤 한다. 물론 강의장에선 당당한 어투로 말한다. 내가 말하는 이 내용을 안 믿을 거란 생각때문에 더욱 그렇다. 분명 <어떤 깨달음>을 세상의 어떤 것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게 확실한 듯 하다.

깨달음의 주체는 누구인가? 물론 나일 것이다. 내가 깨닫는 것이지 그 누구도 아니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 벽면에 시시각각으로 그려지는 그림자 그림, 고함이라도 치듯 붉게 물드는 석양, 그리고 외딴 곳에서의 느낌이 감정을 자극한다. 깨닫길 원하며 갈구하는 것은 무엇에 대한 답이 딱 떨어져 나에게 위안을 준다거나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강의에 자주 등장하는 사진들이다. 제목은 '버려진 거울' '이 또한 지나가리라' '긍정적 시선'이란 제목의 작품들이다. 이 사진들은  그 안에 어떤 것을 주입한다기 보다는 이야기로 풀어가기에 좋은 소재들이다. 

'버려진 거울' 

처세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자기 잘났다고 떠들어대면 상대은 싫어한다. 반감만 있을 뿐이다. 버려진 거울은 사람들의 시선에서도 버려진다. 그런데 이 거울이 나의 시선에 들어왔다. 이유는 거울 속에 아름다운 석양 때문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거울 속의 석양은 타인에 대해 긍정적인 시선이다. 자신을 어필하기에 앞서 타인을 긍정적으로 말해주라는 것이 이 사진의 의도이다. 자신을 높이는 방법을 논하고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해가 저물고 있다. 강변을 지나는 차 안에서 촬영한 작품이다. 강가에 있던 나무 가지가 흔들리고 있다. 그런데 강건너는 고요하기만 하다. 시간과 공간을 혼용해 보자. 그건 가까운 곳은 현재를 의미하며, 강건너는 과거나 미래를 의미한다. 지금 나무가 흔들린 것도 나무가 아니라 나 자신이 흔들리고 것이다. 그 흔들림은 내 마음이다. 현재는 누구나 혼돈 속에 살아간다. 원인은 불안전한 인간이기에 그렇다. 강건너는 과거나 미래이다. 지금은 혼돈과 고민에 빠져 있지만 시간차에 의해 모든 것은 사라진다. 이 또한 지나 가리라.

'긍정적 시선'

마지막 작품은 딱히 제목을 붙여 말할 건 아니다. 받아 들임에 대한 문제이다. 이 사진을 노인들에게 물어보면 튜율립 꽃이라고 한다. 시력이 안 좋은 노인들은 꽃봉오리처럼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은 찡그리며 생선 대가리라고 한다. 나이가 먹으면 귀도 잘 안들기고 얼굴에 주름도 생긴다. 성형도 하면서 세월을 원망한다. 그러나 그건 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받아 들여야 한다. 나이가 먹으며 추한 것도 꽃처럼 볼 수 있고, 나쁜 소리는  좋은 소리로 각색하여 듣는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것이 자연의 이치이자 지혜이다. 그걸 따르자는 의도이다. 

그렇다. 깨달음의 주체는 나다. 나 이외의 무엇도 나를 호령할 순 없다. 내가 깨닫고, 내가 순응하고, 감정과 이성을 가지고 판단하면서 희로애락 속에 살아가는 것도 나 자신이니 말이다. 세상이 말하든 그렇지 않든 나는 그 안에서 찾아서라도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 지속적인 사유를 통하여 충분히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삶의 혜안도 얻을 수 있다. 사진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교두보 역할을 한다. 아니, 그럴 것이다. 

사진 속에 나타난 <어떤 깨달음>.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