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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휴 칼럼/사진에게 말걸기

<보여주는> 사자와 표범, 그들의 무대는 달랐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사자나 표범은 위험하다. 인간은 동물원에 가두고 본다. 야생성을 잃은 사자는 사자가 아니다. 죽은(死) 자이다. 표범도 그렇다. 세렝게티로 가면 국립공원에서 그들의 야생을 볼 수 있다. 사물이나 동물이나 똑같다. 그들과 대화를 나눌 순 없다. 단지 유추할 뿐이다. 동물들의 일상을 읽어내는 방법이 있다. 스토리를 만들고 은유적으로 해석하는 거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도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동을 해석하는 거다. 세렝게티에서 사자와 표범의 행동을 해석해본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세렝게티 대초원에서 <바라보는>과 <보여주는>의 개념충돌이 일어난다. 바라보는 것이 찍는 것이란 사진철학적 사유에 익숙한 나. 그곳에선 <보여주는>의 의미가 더 커보인다. 보려는 의지가 죄절되고 보여주는대로 봐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두 개념은 둘다 <보다>를 전제로 한다. 차이는 범위이다. <바라보는>은 자유롭게 무한정 볼 수 있고, <보여주는>은 보여주는 프레임안으로의 <보다>이다. 한정짓는 가운데 그 상황에서만 볼 수 있다. 시간과 장소를 규정하는 것이다. 나는 그 시간, 그 곳에서 볼 수 있다. 단순한 차이 같지만 완전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안내를 받아 사자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사자들이 낮에는 낮잠을 잔다. 경계를 서는 한마리만 빼고 꿈나라다. 경계서는 사자도 가끔 눈동자만 돌리고 있을 뿐이다. 사자는 저녁이 될 때까지 그들을 지켜보는 우리 곁에 있다. 나무에 올라타기도 하고, 잠을 깨며 딩구는가 하면 다양한 동작으로 카메라의 프레임에 들어오려 안간힘을 쓴다. 해가 기울자 어디론가 떠난다. 일터로 출근하는 거다. 그 모습은 마치 무대에서 배우들의 퇴장과 같다.


반면 표범은 다르다. 표범이 나타난다.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차량들 사이를 빠져 나간다. 총잡이 같다. 잠시후 표범이 우리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듯 사냥을 한다. 사냥감이 자신의 몸집만하다. 먹고 끌고 가기를 반복한다. 급기야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쉰다. 배부름에 지친거다. 표범은 너무 일찍 사냥을 하는 바람에 클라이막스를 너무 빨리 보여준 거다. 더 이상 관객은 그곳을 지켜보지 않는다. 그를 두고 우리는 그 곳을 떠난다. 공연 중 관객이 자리를 뜨는 격이라. 글로 표현한다면 너무 빨리 결론을 지어 흥미를 잃은 것이다. 

사자는 기승전결을 잘 조율하여 퇴장과 동시에 극이 끝난다. 반면 표범은 너무 일찍 결론을 지어 흐름이 매끄럽지도 않았을 뿐더러 관객의 시선을 끄는데 실패한다. 이 둘의 상황은 우리가 보려는 의지과 상관없이 진행된 것이다. <바라보는>이 아니라 세렝게티의 동물들은 우리에게 <보여주는>이란 전제이다.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보여주는>을 통하여 그들의 일상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는 멍하니 지켜본 것이고.

사자와 표범, 그들의 무대는 달랐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