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이야기할때 흑백을 사용하곤 한다. 무채색은 공평함을 주고, 흑백의 대비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때문이다. 이 사진은 양지와 음지의 양면을 정확하리라만치 나뉘어져 있다. 그것이 이 사진에서 다른 이야기를 전달해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사진에서 인간의 심리와 더불어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는 이런 말을 들었다. 충격적이긴 하지만 그들만의 프레임속에서 자기관리라 생각했다. 한 반에서 어떤 아이가 왕따를 당하는데, 동조하지 않으면 자기가 왕따를 당하기에 그냥 따르는 아이들의 이야기말이다. 인간의 감정에는 긍정과 부정이 혼재한다. 물론 부정이 모두 좋은 것도 아니며, 긍정이 모두를 즐겁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대모가 한창인 80년대 대학을 다녔다. 가족은 나에게 데모하면 안된다고 말했고, 그 당시 사회는 체제를 바꿔야한다고 독려했다. 나는 적극가담자가 될 수도, 방관자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나는 중간자적인 입장에서 적절한 처세를 하며 4년을 보내야했다.
사진은 작가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표현되고 그 다음에 해석되어진다. 그러나 의도가 어느 시점에서 부여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없다. 물론 이 사진은 찍은 다음에 곰곰히 바라 본 후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이다. 이런 상황은 미리 연출할 수는 없다. 물론 영화처럼 철저하게 계획된 스토리라면 가능하지만 단지 물놀이에서 함께 간 사람들의 사진을 찍으면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몇명이 한 사람에게 물을 뿌리며 놀고 있다. 이들은 적극 가담자이며 물을 맞고 있는 사람은 적극피해자이다. 그럼 우측에 지켜보고 있는 사람은 방관자이며 좌측에서 도망치고 있는 사람은 상황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물을 맞고 있는 사람의 오른쪽에 고개를 물속에 쳐박고 있는 사람은 간접 피해자이다. 이런 상황을 두려워하는 것이며, 방관하고 있다. 이 사람은 피해자임과 동시에 방관자이다. 바라보고만 있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중간에 수건을 들고 고개를 돌린 사람은 가담자에서 자신에게 물이 뿌려지는 것에 고개를 돌리고 있다. 이 사람은 가담자에서 피해자로 전락한 상황이다.
한장에 사진속에 행위자들을 칼질하듯 정확하게 나눌 수는 없다. 단지 나의 시각일 뿐이다. 또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볼때, 또 다른 상황이 유추될 것이다. 물론 이 안에 있는 사람이 봤다면 각자 다른 시각으로 이 사진을 해석할게 뻔하다.
그래서 작품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을 사진을 읽는자의 자유에 맡기곤 한다. 작가가 극명하게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는 것 또한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이 모든 상황과 방법들 그리고 그것을 재단하는 것들은 최종 심판자인 관자에게 맡겨지는 것이 중요하다. 사진을 찍는 것은 화살이 과녁을 향에 날라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일단 쏘고 나면 그 상황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음이다. 사진 또한 그 결과는 바라보는 자의 몫으로 맡겨야 할 것이다. 찍는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보고 판단하며 즐기는 사람은 다수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논리로 보더라도 이게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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