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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관련/백작가의 '작가만들기'교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을을 알리는 작은 목소리.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기차는 오랜세월 동안 낭만의 추억을 상징해 왔다. 기차는 주체적이지도 주도적이지도 못하다. 스스로 목적지를 규정할 수 없는 기차는 의욕을 잃어 버릴 수 있으나 그의 몸짓을 본 사람이라면 이런 속단은 금물이다. 인간에게 의도하지 않은 행위에서 보여지는 허튼 소리같은 가벼움에 비하면 기차는 인간에게 작지 않은 내면의 동의를 던져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대한 의미는 사람들의 동정과 관심을 끄는 언어임에 틀림없다. 기찻길에서 만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작가의 생각을 통해 이미지가 갖는 의도를 훔쳐보려 한다.


이 사진에는 감정이전에 정보가 담겨있다. 노출은 그늘에 맞춰져 있고, 색감과 광질에서 보여지는 때는 석양이며, 계절은 가을을 알린다. 너무 밝은 노출은 작가의 기술적 오류를 지적한다. 벌겨벋겨진 채 덩그러니 서 있는 아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찬바람에 따스한 빛으로 옷을 입히려는 의도로도 보인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로든 작가는 아이에게 관심을 보인 자체가 칭찬받아 마땅하다. 반복되는 뻔한 일상처럼 보이는 철길 위의 달아서 번들거리는 모습은 코흘리게 아이의 여러번 문질러 생긴 빙판같은 콧물자국같다. 어린시절, 철길에 귀를 대고 어디쯤에 기차가 오고 있는지 내기를 했으며, 동전을 올려 놓고 눌린 그것을 신기해 했던 말못할 범죄같은 이야기는 철길 근처에 살았던 아이들이라면 공감하는 추억이다. 잘게 부숴놓은 자갈들이 인위적인 모습으로 으레히 그랬던 것처럼 철길 밑바닥을 지키고 있다. 

이 사진 속에서 '나'는 누구일까? 찍은 이로 규정하면 나머지는 타자로 지정될 수 있다. 그러나 작가의 너그러운 마음은 타자를 유인하여 다정한 시선으로 타자를 '나'로 추천하고 있다. '나'란 주체는 바로 단풍든 아이같은 나무이다. 찹초든 어린 나무든 그 이름에는 관심없다. 그냥 그가 바라 본, 그가 이름 붙여준 '나'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그는 세상과 조우하고 있다. '나'가 갖는 행위에 대한 작은 관심으로 보고 있는 중이다. 넓지 않은 철길이 담장처럼 커 보이는 이유는 그곳을 향해 무릎을 꿇고 그에게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까워진 곳에서 그는 자신을 타자로 객관화하며 그에게 '나'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마치 김춘추시인이 말한 꽃처럼. 뜨거운 여름날의 열기속에 지워졌을 연한 이파리가 이제 성인의 포즈를 취하고 있음에 작가는 가슴 저려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존재하고 있는' 이라고 작가는 말했다. 작은 시선만으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어휘는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존재에 대한 갈망은 삶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상황이라는 것에 그가 가진 인생의 연륜이 밝혀진다. 존재란 어휘는 존재자와는 다르다. 그곳에 '나'라는 언어로 표현된 것은 존재자가 아닌 그가 규정한 존재만이 존재할 뿐이다. 존재자는 없다. 존재자는 그의 마음속에서 그와의 조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생명력에 대한 가치를 논하기위해 셔터를 누른 것이라는 지적은 다분히 표면적인 것이다. 그의 시야는 접사렌즈처럼 가까이에 다가가기위한 소심함만은 아니다. 그는 현재 존재하고 있는 그에 대한 경의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 그를 말한다면 그는 개구장이다. "이봐,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어?" "아, 나 여기 있고, 너 기기 있지." 영화, 왕의 남자에 나오는 대화들이다. 주체와 타자를 규정하려 했던 철학자 레비나스의 말처럼, 타자가 있음으로 자아를 규정짓고자 했던 말이 떠 오른다. 앞문장과 뒤 문장은 동의어처럼 보이나 정 반대의 비유를 하고 있다. 작가는 놀고 있는 것이다. 자신과 철길 옆에 서 있는 타자를 서로 맞바꾸며 놀고 있다. 내가 너이고, 너가 나인 아이러니한 개념으로 언어적 유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그는 수다스러울 것이 뻔하다. 말을 아끼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으나 수다장이는 음성이 발화되어야만 완성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의 마음안에서, 눈빛민으로도 그는 다분히 수다스러운 사람임에 틀림없다. 

미학에 의존하지 않은 구도, 꾸밈없는 그의 정직함이 눈에 밟힌다. 백승휴가 뱉어낸 음성 속에 맘상해 하지 않을까하는 마음에서다. 조금이라도 사물은 '나'라는 언어를 사용한 너그러움이라면 나의 어떤 변명도 능히 받아줄 수 있으리란 위안을 가져본다. 위안이란 단지 나 스스로와의 약속일뿐 찍은 이의 감각으로는 어떤 결론이 부여될 지는 모를일이다.

갑자기 그와 만나 수다스런 세상이 결코 수다수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에게 공감할 대단한 수다를 떨고 싶어지는 이유는 뭘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을을 알리는 작은 목소리.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