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손으로 완성하는 결실에는 언제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것은 그들의 행위자체가 개인적인 위안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소통에는 그것을 중계할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혼자만의 이야기에도 그 전개방식에 문제가 있어서는 스스로도 흥미를 잃어버리곤 한다.
이들의 맑은 눈동자는 털이 가진 희색의 명료함을 닮았다. 하얀색은 순수를 말하지만 시작을 뜻하기도 하고 하나도 없음(무)를 말하기도 한다. 이들의 몸짓에서 나는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가야함'을 말하고 싶다. 이곳에서 저곳을 가야하는 물리적인 이동이 있고, 시간의 흐름으로 말미암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야할 미래가 존재가 존재하기도 한다. 끌고 가야하는 사람이 있고, 어깨동무하며 더불어 가야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절묘한 조화 속에서 이뤄진다. 에베레스트 정상을 오르는 산악인들의 상황에서도 이들의 몸짓은 존재한다. 멀리 가려면 혼자여서는 안된다. 더불어 살아가라는 암시를 몸짓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망가진 가족의 이야기는 아니다. 각자다. 그냥 다름을 인정하면 된다. 작가의 창작적 방법중에는 'different'가 있듯, 모든 어울림 속에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많은 오해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뇌하게 된다. 우두커니 앞만 바라보는, 눈을 살짝 감고 곰곰히 생각에 빠진,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으나 정확히는 전혀 다른 방향을 하고 선, 입맛을 다시며 몰입한 각자의 모습에서 그들의 세계를 점칠 수 있다. 표정으로는 내면을 파악할 수는 없다. 단지 점칠 뿐이다. 어찌 인간의 무능이 오묘한 표정의 세계를 꿈꿀 수 있겠는가?
탁한 배경에서 그들의 단조로움과 다운된 감정을 보여주고 있다. 표정 또한 가관이 아니다. 고뇌하는 것도 아닌, 그냥 권태로울 따름이다. 진취적인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들의 표정에서 우리는 그냥 좌절된 상황만을 이야기해야 할까? 아니다. 이미지는 권태를 말하지만, 그 권태만큼이나 창작적 의욕을 생성시키는 것도 없을 것이다. 이 권태로운 시간을 얼마나 갖느냐에 따라서 작가적 에너지를 펌프질하게 될 것이다.
'가야함', 'different', '권태' 등 각기 다른 제목을 가지고 있는 작품들의 공통된 방향은 희망을 말하고 있다.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결코 추하고 나쁜 것은 없다. 그렇게 볼 뿐이며, 그 방향이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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