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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휴 칼럼/장소를 만나다

가을의 중턱을 떠올리게 하는 기억들, 추석!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가을의 중턱, 추석이 존재한다는 것은 최소한 나에게는 축복이다. 적당히 선선하고 먹거리는 다양하고 고향을 갈 일이 있으니 더욱 그렇다. 고향의 길가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반가운 인사를 나누기에 어색하지 않다. 이번 명절은 주말이 절묘하게 붙어 있어 5일간의 연휴라서 여유롭다.

성묘길에 아이가  밤을 줍고 있다. 증조부 묘소옆에 심겨진 밤나무가 아이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자손에게 먹거리를 제공하는 의도처럼 비춰지는 이 풍광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연상된다. 아이의 할머니가 짚고 온 지팡이를 들고 벌어진 밤을 꺼내고 있다.

가을 바람이 만들어낸 걸작품이다. 어린시절 내가 툼벙거리던 저수지가에 바람에 떨어진 잎들이 한쪽으로 몰려있다. 나뭇사이로 새어 들어온 빛이 그림자를 만들어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 내고 있다. 억지로 우기자면 모네의 수련이다. 예술이라는 것이 따로 있나, 그 작가의 성향을 얼추 보여주면 그뿐이지. 나는 이 사진에서 모네를 떠오려봤다.

잡풀에서 꽃을 피웠다. 채송화나 개나리처럼 나름 이름을 가지고 있는 꽃과는 부류가 다르다. 시골출신인 나에게도 낯선 그냥 들꽃이다. 들꽃이라도 분류되는 꽃들은 무지 많지만 이 꽃이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그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냥 들꽃으로 부른다. 가치를 말하는 브랜드처럼 그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이 들풀을 보면서 느껴본다.

동네 대문 사이로 보인 풍경이다. 아주머니가 서울 딸네로 올라간뒤 소식이 끊긴지 오래되었단다. 시멘트로 만든 마당의 틈사이로 맨드라미가 수탉벼슬을 연상시키기라도 하듯 당당하게 피어있다. 언뜻보면 집안에 장닭이 모이를 찾아 쪼아대고 있는듯 보일지도 모른다. 집은 아무리 게으른 사람이라도 살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사람의 향기란 여간해서는 지워지지 않는다.

시골집 창고에 손녀가 그림을 그렸다. 이름을 '보물창고'라고 했다. 그랬더니 나의 어머니는 그곳에 보물들을 집어 넣었다. 자가용과 트랙터 등 아버지가 애지중지 여기는 것들로 꽉 차있다. 가을이면 그곳에서 정성껏 키운 포도와 선물받은 과일상자들이 수북히 쌓여있다. 자식들이 왔다 가기라도 하면 몇박스씩 차 트렁크로 옮겨진다. 그것은 부모의 마음이 이동하는 것이다.

마당 앞 툇마루가 장판으로 씌워져있다. 그것은 비바람에 끄떡없게 하기위한 시골사람들의 지혜이다. 그곳은 바람이 다니는 길목이다. 그 앞에 앉아 있노라면 아무리 더운 여름날에도 시원스럽게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어준다. 멀리 보이는 서해안 고속도로하며 잘 익어가는 들녘의 곡식들이 고향의 여운을 느끼게 해준다.

영양가 없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있다. 물론 먹지도 못한다. 멀리에 조선소나무가 그 몸매를 자랑하고 있으니 이 사진의 가치가 상승되고 있다. 게으른 밭주인이 잡초를 키우고 있다. 의도적이지 않은 그냥 성장한 그들은 성묘가는 사람들에게 자연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오리지널 캔디드촬영이다. 아들과 아내, 그리고 나다. 돼지 목살을 구워먹겠다는 일념으로 밭에서 깻잎을 따고 있다. 내가 딴 것은 아들과 내가 나눠 들고 있고, 아내는 연신 깻잎을 따내고 있다. 멍때리고 있는 나의 모습은 무엇인가? 남들에게 얼굴 표정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무슨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가? 무슨 생각에 잠긴 건지 심오하기만 하다.

저수지 옆 밭에 채소씨를 뿌리는데 물이 몇 바가지 필요하다. 그런데 아버지는 경운기를 끌고 왔다. 포병은 10보이상은 차량으로 이동한다더니 아버지가 그렇다. 일을 간단하게 마치고 손자손녀를 태우고 내려가는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당신의 아들, 나를 지게위에 태우고 가던 그때를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그시절의 나의 나이는 5살정도였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잊지 않는다더니만 나는 그때 아버지와 나무하러 가던때가 기억난다. 그것도 생생하게... 아버지의 나를 바라보는 흐뭇한 미소도 함께.

이 모습의 주인공은 아내다. 깻잎을 한 손에 들고 걸어가고 있다. 동네 길목이다.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나 왠지 추석때 보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풍성한 그 무엇이 담겨있다. 

달리기로 한시간 남짓 걸리는 곳으로 떠났다. 아들이 가다보면 찍을 일도 있을 거니깐 카메라를 가져가라고 나에게 건내줬다. 그 목적지는 여동생의 팬션이었다. 무창포근처에 있는 곳에서 가족들이 모여 저녁을 먹을 요량이었다. 가는 길목에  뒤돌아 보니 우리집이 어렴푸시 보이고 있었다. 가로지른 서해안 고속도로가 때로는 야속하기 그지 없다.

추수를  앞둔 벼이삭이 자빠져 있다. 바람이 고르게 불지는 않았나 보다. 공룡이 나타나 밟고 지나간 모양이다. 콤바인이 벼를 벨때면 힘든 부분이다. 그래도 올해는 태풍이 지나가지 않아서 온전하게 곡식이 잘 익어가니 농부들의 표정에는 풍성함이 베어 있다.

길가에 화살표는 인간의 삶과 닮아 있다. 길을 묻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종교에 의지하는 이유도 삶의 길을 묻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불안함 속에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저녁나절 석양이 의자를 비추고 있다. 주인을 잃은 이 의자는 누가 앉아 있었으며 그 자리에서 무슨 생각에 빠져있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한시간 정도를 달려간 그곳에서 가족들이 모여 저녁을 먹으며 담소를 나눴다. 일년에 몇번이나 만나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성질 급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벌써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함께 하지 않아도 그냥 자식들이 주변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만땅이다. 

이 사진들은 나에게 기억을 재생시켜 줄 것이다. 그래서 항상 행복을 선사할 것으로 믿는다. 나는 그것을 찍고 이글을 쓸 수 있는 이 공간과 나의 여유로움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