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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관련/백작가의 '작가만들기'교실

감성을 찾아 나선 따스한 손길, 이재현작가.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사진을 보면 십중팔구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게 사진이 매력적인 이유이다. 하나더 추가한다면 그 안에 그가 남긴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몰래서 가슴조이며 훔쳐보는 아이의 설렘처럼, 인간에게 관음은 낮게 평가되어야 할 항목이 아닌 누구나 존재하는 필수적인 요소중에 하나이다. 사진을 찍는 순간 그 판단은 시선을 소유한 자에게로 넘겨진다. 찍은 사람 따로, 보는 사람 따로의 감정을 지닌다는 것이다. 조금의 공감이라도 얻어내기위해 그 표현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은 점, 선, 형태, 형체에 으로도, 그리고 색깔과 질감으로도 다르게 표현된다. 누구의 느낌을 그 누구도 규제할 수 없음이다. 나는 그 규제될 수 없는 틀들을 재구성하여, 사진 속에서 계절이나 인간의 삶을 비유하여 매듭을 풀어보고자 한다.

하늘을 통과한 태양이 구름 속에 갇혀있다. 보랏빛 향기가 빛가에서 서성인다. 봄의 아침이다. 가을에는 낙엽이라면 봄에는 이파리가 그 환희스러움을 상징한다. 긴 잠에서 깨어난 멍한 눈빛을 하고 있다. 물과 하늘은 닮아 있다. 어둠 속에 한줄기 빛이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 잎의 탄생, 태양이 그들을 완성해 놓았다. 마치 카메라의 프레임처럼. 작가는 몽안의 눈동자로 자신 속에 갇힌 자신과의 만남을 시도하고 있다. 가끔은 수다스러우나 말없이 자신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이다.

찬란한 태양이 생명을 비추고 있다. '아장아장' 의태어처럼. 빛은 젊음이고, 여름이 되었다. 그 생명수는 환하게 웃음짓은 아이들의 표정처럼, 생동한다. 타원의 파장은 세상에 원만함으로 관계지어진다. 접촉이 새로움을 만들어 내는 관계의 연속으로 이어지면서 그 성장은 계속된다. 녹색과 파랑의 친근감이 하나가 되어 젊음이라는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소심하던 그가 서서히 세상에 발을 내딛고 있다.

활짝 핀 꽃만 꽃이 아니다. 베시시 웃으며 찾아드는 아이의 음성으로 세상은 우리에게로 다가온다. 바람에 흔날리는 꽃잎들의 아우성은 합창을 한다. 희미와 선명은 이분법의 대립은 헤겔의 정반합처럼 새 생명을 탄생시킨다. 왔다 갔다를 거듭하는 그네의 습성처럼 생각의 절구통은 달나라 토끼들의 다정함을 닮았다. 가을은 그냥 오지 않는다. 여름과 가을의 중간에는 항상 새로운 세상이 존재한다. 갈색이 아물기전에 반듯이 여름의 끄트머리에서 꽃망울의 아품과 환희가 그 경계를 매듭짓는다. 작가는 정리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에게도 하나 하나의 개념을 명명하고자 한다. 여름은 여름, 가을은 가을, 그리고 그 경계는 명확하게. 그 계절에 중간은 작가가 따로 빼내 만든 세상이다. 남자의 갈비를 뽑아 만들어낸 여자의 S라인처럼 말이다.

갈색추억처럼, 현재는 존재하지 않으나 존재한다. 강한 터치감으로. 색은 없으나 생명은 꿈틀거린다. 럭셔리의 상징언어처럼 낮은 채도에서 풍기는 묘미는 상상가들의 가슴속에서 춤을 춘다. 때로는 볼 수 없는, 어쩌면 잃어버릴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풍광이이다. 형체를 가진 나뭇잎이 형태로 보여진다. 작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두리번거리며 새로움을 창조하다. 그의 자존은 다른 것과의 조우를 통하여 유지되어지곤 한다. 때때로.

봄비는 여름을 재촉하고, 가을비는 겨울을 재촉한다. 자연의 이치이지만 이처럼 매정함도 없다. 그 시간의 유희를 시샘하듯 항상 세상의 이치는 그렇게 굴러간다. 갈라진 틈사이로 오아시스의 물줄기가 겨울이 결코 절망이 아닌 희망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상처가 아무는 과정처럼, 쩍쩍 갈라진 매마른 대지위에 뿌려진 빗줄기처럼 표피는 활동을 재개한다. 높은 곳에서  바라본 깊이처럼 바닥을 갈라놓은 존재에 대한 원망과 분노는 진행중이다. 이끼낀 질감속에 만져질 듯 다가오는 형상들이 옷을 입는다. 작가는 아픔속에서도 희망을 부른다. 처절하지만 그 과정을 즐기는 새디스트처럼.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것은 없다. 시든 꽃잎에서도 아름다움을 찾고자 하는 그녀의 긍정성은 환한 세상을 만들어 냈다. 선들이 엮어낸 리듬으로 운율이 춤을 춘다. 생각이 생각을 만들어내고, 역광이 잠재운 이 시점에서 새로운 출발을 모의하고 있다. 음악이 소리를 내어야 세상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며, 소리의 유무로 판단될 수도 없다.  맹인이 찍어 놓은 세상, 청각장애인이 음성속에 춤을 출 수도 있다.

늦은 겨울, 지난 가을이 남긴 잔애가 봄을 예시한다. 추억에 잠긴 연인들의 기댄 어깨에서 찾을 수 있는 장면처럼 노란 낙엽이 새싹으로 환생을 거듭한다.


노란 가을이 여행을 떠난다. 고독감에 사로잡힌 환영은 자신의 숲으로 돌아간다. 누구나 돌아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이거늘 우리는 항상 그것들에 조정되어진다.

파도가 만들어내는 질감위에 우뚝선 선들이 그 당당함을 자랑한다. 직선과 곡선이 서로를 이해하며 화합을 거듭한다. 반영된 세상과 현실의 환영이 놀음을 시작한다. 저무는 저녁햇살이 제 갈길을 떠난 빈자리에 결코 고독하지 않은 자의 당당함이다.


한 작가가 세상을 재단하는 이치는 그의 체험에 의해서 재구성된다. 체험은 경험과 생각의 융합이다. 세상의 주인도 나요, 그 세상 안에서 또 다른 세상을 만드는 이도 나다. 나는 자존이요, 주인공이다. 모든 것을 만들어가는 것은 나로부터 생성되어진다. 작가가 가진 원칙은 어김없이 사진마다 달라 붙어 있다. 그녀의 겸손은 섬세하게 사물과 조우한다. 구도에는 황금분할의 원칙을 지켰고, 색깔의 조화로운을 만들어내기위해 끼리끼리 모아두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주부로서 살아온 절약정신이 뭐 하나 버릴 것 없이 작품으로 만들어낸 시선이 돋보인다. 그 꼼꼼함은 그의 성향을 예견한다. 시간에 의해 사라질 사물들을 고착화시키는 과정은 새가 박제가 되어 영원을 갈구하는 모습과도 닮았다. 생각을 프레임 속에 담아내는 작가의 숨결은 가느다라나 그 호흡은 길다. 똑같은 크기가 아닌 리듬으로, 그 리듬이 명확하게 사진속에 담겨져 있다.  

작가 이재현은 사물도 생명을 불어 넣는다. 살칵 살칵, 그녀의 사진찍는 부드러운 느낌이다.


감성을 찾아 나선 따스한 손길, 이재현작가.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