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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휴 칼럼/Photo Essay

석류가 숨겨 놓은 또 다른 빨강, 그리고 얘기.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한 장의 사진 속에 얼마나 많은 생각이 담겨있을까?  그 의문과 가공 가능한 이야기에 대한 도전을 시도해 적이 있다. 제사상에 올라온 석류를 칼질한 단면이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나 씨가 반토막 난 것은 없다. 그 유연함이 극단성을 모면한 것은 아닐런지. 선홍빛 알맹이가 반투명하게 씨앗을 감싸고 있다. 신비로움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일 것이다. 칼질 자욱으로 묻어난 듯, 몸둥이에 핏자국이 선명하다. 원래 석류는 손으로 뽀개야 한다. 그래서 그 풍성함을 한 눈으로 확인해야 즐거움이 배가된다.  

석류란 이름만 들어도 신맛때문에 조건반사처럼 입안에 침이 고인다. 먹지 않고 보기만 했는데 선험이 던져주는 정보때문이다. 많이 먹어도 밥이 되지는 않는다. 비주얼 대비 먹거리로는 턱부족이다. 아구작거리며 먹을 수도 없다.  씨때문이다.  신맛은 석류의 정체성이나, 잘 익은 것은 단맛 또한 일품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몸에 좋다는 것들이 적혀있다. 그러나 사실 몸에 좋다는 것 또한 얼마나 좋은 것이며 '누구나' 좋은지에 대한 것은 정확하지 않다. 나무에 열린 그 신선함과 화려함이 더 좋을 듯하다. 나는 석류에 관한한 맛을 보는 것보다는 나무에 매달린 그 자태가 더욱 매력적이다.

촬영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일단 크기에서 정확한 평면도는 아니다. 비스듬하게 찍혔다는 말이다. 아래와 위에 있는 씨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이다. 아이폰으로 찍으면서 몇가지의 트릭을 부렸다. 물론 하나 하나에도 이유는 있다. 일단 크기를 다르게 하기위해 비스듬하게 찍은 이유는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아래쪽에만 살짝 껍질이 보이게 했다. 이 또한 단조로움과 단면에서 보여지는 전체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기위해서였다. 나름의 신비주의? 세번째는 흔들림이다. 자주 쓰는 기법이긴 한데 흔들면서 찍는 것이다. 각도가 있다는 것은 씨앗의 크기뿐만이 아니라 반사된 빛의 길이가 다르다. 가까운 곳은 살짝 늘어졌다면 멀어질 수록 그 반사된 빛이 길어진다. 그것은 멀어질수록 화각이 커지는 것에 대한 광학적 논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멀리 있는 빛의 흔들림은 벌레가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도 만든다. 선명한 것을 싫어한다. 상상하기에 좋지 않다. 극명하게 정답을 정해놓고 시작하는 것보다 따분한 일도 없다. 뭔가 다양한 가능성을 놓고 실타래를 풀어가는 머리아프지만 상상하기에 안성맞춤이 추리소설처럼. 하나 더 노하우를 공개하자면 역광 또는 측광을 활용하여 잘라진 매끄러운 단면이지만 질감을 살리고 입체감을 부여하고자 했다. 아마 설록홈즈였다면 내가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나의 의도를 꽤뚫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행위에는 이유가 있듯이, 마구잡이로 사진을 찍더라도 그 이유는 반듯이 존재한다. 그래서 그 사람의 성향을 분석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석류가 잘려진 제사상에서 제일 먼저 시선을 끈 이유는 색감이었다. 단일색보다 그라데이션이 매력적이었다. 연속된 다양한 색감에는 패턴이 존재하지 않는다. 불규칙적이면서도 나름의 공식이라도 존재하듯 미학적 논리를 부가할 정도의. 모든 예술이 자연에서  모방했다는 아리스토 텔레스식의 미메시스처럼 자연이 주는 가르침에 창작자는 겸손함을 배워야한다. 자신이 대단하다고 건방떠는 예술가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자연이 좋다. 자연숭상? 이입부는 색깔이라면 본론은 다양한 이야기로 풀어질 것이다. 입구는 빠듯이 삐집고 들어갈 공간이었는데 들어가 보니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하고 있던 영화의 한 장면을 떠 올리게 하는 것과 같다. 

더 이야기를 끌면 철학적으로 진입된다. 그곳에 가면 나의 허접한 개똥철학이 나올까 두려워 이만 접는다. 석류는 오늘 나에게 수다를 떨게 해준 친구였음을 인정한다. 먹지 않고 바라봄으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