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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휴 칼럼/Photo Essay

'이른 아침'에 대한 단상.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아침은  신비롭다. 대낮의 단조로움에 익숙한 우리는 다른 세상으로 바라본다. 이 아침은 이른 아침이다. 햇빛이 직접 피사체에 방향을 만들어내지 않는 시간말이다. 저녁 나절도 있지만 신비주의를 주장할 수 있는 빛은 이른 아침에 접할 수 있는 미약한 푸른 빛이다. 분명 색온도는 높다. 그러나 카메라에 세팅된 화이트발란스는 day light광으로 설정해야 한다. 그래야 카메라의 시선이 진정한 아침을 읽을 수 있다.


둥글레라는 화초이다. 강렬한 빛이 사물을 비춰졌을 때와는 다른 잔잔함이 묻어 있다. 좌측 위에서 떨어지는  엷은 빛이 녹색 이파리에 라인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관심을 보였던 색깔은 백그라운드에 그려진 벽면에 있었다. 그늘에서 만들어진 습함이 질퍽한 질감을 만들어 내며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섬세하게 노출되는 빛이 프레임을 구성하여 시각 속에서 생각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아침이슬처럼 물방울이라도 매달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른 잎에서 보여주는 질감은 물방울 못지 않은 신선함을 준다.

녹슨 칼날이 무딘 감정을 끌어 들이며 또 다른 여유로움을 형상화하기에 이른다. 촛점을 잃은 전봇대가 더욱 시선을 끈다. 숨기려 하면 더욱 호기심이 발동하는 인간의 심리처럼. 바닥에 내던지 듯 꽂혀있는 부엌칼이 부추밭에서나마 자신의 역할을 기다린다. 장수의 뒤를 따르는 병졸들처럼 부추에게서 힘찬 기상이 보인다. 생명의 복원력이 잘라낸 부추에서 볼 수 있다.  부추 무침의 짭쪼름한 맛이 미각을 자극하며 주부의 사랑을 독차지 하곤 한다.

대문앞 텃밭의 편리함이란 한번 발을 들여 놓으면 대문 안에도 텃밭을 만든다. 게으른 가로등이 멍하게 켜져 있다. 사진으론 보이지 않는다. 아침의 빛으로도 가로등의 존재가 묻혀 버린다.  

저멀리, 동네가 보인다. 이웃집 개가 짖지도 않고 카메라를 바라본다. 친근감의 표시일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개팔자는 정해진다. 도시의 주인을 만났더라면 방안에서 가족처럼 사랑을 독차지 하지 않겠지만. 작은 집에 의지하며 엄동설한도 버틸 수밖에 없다. 얼마전 지나가는 사람을 물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나에게 보여준 친근감은 착한 개로 표현되어질 수 밖에 없었다.

농부에게 이른 아침은 일어나는 시간이다. 늦잠이 용납되지 않는 농부에게는 약속과도 같은 것이다. 긴 하루가 짧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일에 대한 몰입이며, 즐거움을 일에서 찾고자 하는 갈망때문이다.

농부의 하루는 바쁘다. 한가한 겨울을 보내고, 봄이 찾아왔다. 봄, 여름, 가을은 농부를 들녘으로 몰아낸다. 직업병처럼 한시라도 놀라치면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밭도 아닌 뒷산 초입에 무성한 잡초는 게으름으로 보여진다. 특히 농부에게는 그렇다. 그 농부는 나의 부친이시다. 부지런함이 현재의 행복을 안겨주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일상은 그냥 스친다. 아름다움이란 기준은 내가 정한다. 공기의 소중함도 부족할때 비로소 느끼는 것처럼, 소중함을 아는 것은 의식으로부터 나온다. 아름다운 일상을 카메라를 통해 볼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언제나 이른 아침은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항상 그 찰나를 찾아 떠 돈다.

이른 아침에 대한 단상.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