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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휴 칼럼/Photo Essay

대림미술관, 트로이카(TROIKA)를 만나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대림 미술관은 2014년 4월 10일부터 10월 12일까지 런던이 주목하는 아티스트 트리오, 크로이카의 <소리, 빛, 시간- 감성을 깨우는 놀라운 상상>전을 개최합니다.' 

라는 글을 읽고 단숨에 달려간 전시장. <소리, 빛, 시간>, 좀처럼 섞어지지가 않는 소재를 융합은 사고에 의해서 가능함을  아티스트는 보여주고 있었다. 도록에는 세련된 화법으로 그들의 전시를 논평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전시를 바라보기에 나만의 방식으로 서술하고 픈 건방진 욕구가 발동되었다.

예술가는 아무리 뻥을 쳐도 무죄다.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설득하다가 실패하더라도 그들을 욕하지 않는다. 예술가들에게는 이런 면죄부가 적용된다. 그들의 창작적 의지 자체와, 그로 인한 인식자들의 다양한 상상을 불러 일으켰다는 긍정성이 그들의 행위에 조건부 무죄를 선고한다. 

TROIKA라는 단어가 오랜 세월 매만지며 단련된 생각의 결집체라는 것을 도슨트가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평일의 한산한 인파가 여유롭게 전시를 즐길 수 있었다. 테크롤로지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했지만 그 반면에는 부정적인 것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자인하고 아트적 행위를 통해서 보상해 주겠다는 의지였다. 빵만으로는 살 수 없음을 말하며, 인간에게  상상이 위안을 주겠다는 의지의 경연이었다. 기술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그 현상들을 우연이 아닌 필연적 결과로 설명하며 원형을 제시함으로써 공감을 유도하고 있었다.

잊혀진 과거나 예견할 뿐인 미래나 존재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판도라 상자 속에서 잠긴 미래는 인간의 기대를 유도한다. 결핍에 대한 갈망은 욕구를 불러 들이기 마련이다. 인간은 과거는 이미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고, 미래에 대한 예측에만 집착하고 있다. 미래의 불확실에 대한 불안감을 과학적 원칙에 기대며 한 방향으로만 기억하려는 인간의 과오를 추궁하고 있었다. TROICA는 망각의 과거를 질타하며 우리의 오만을 꾸짖고 있었다.  
 

굳혀진 패턴들로 조합된 일상에 제언하는 이들의 집요함이 시선을 끈다. '신은 우주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 라고 아인슈타인이 말이 눈에 띤다. ILLUSION이 시각예술에서만 존재하지 않았다. TROIKA는 착시가 아닌 착각이라는 근거를 통하여 '그런 듯'한 논리로 제안하고 있었다. 세상은 유와 무로 나뉘며, 무에서 유가 만들어지고, 유가 다시 사라지는 과정을 통하여 무를 완성시킨다. 디지털의 대단한 원리가 0과 1의 이분법에 의하여 오묘하게 구성되는 원리처럼 그렇게 다양한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원리를 검증시키는 대형 작품에서 관자는 그럴 듯한 생각과 그럴 수 있다는 생각 속에서 이분법적 사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우연적 인식을 구체화 시키며 그 인식 속으로 초대하며 놀이를 구성하고 있었다. 우연이 아닌 필연을...


자연을 '그것'이라는 사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라는 의식을 불어넣어 생명체로 부활시키고 있었다. '검은 그을음'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그려낸 그림을 보여주며, 그들의 세련된 화법을 자랑하고 있었다. 또한 'Light Drawings'는 번개라도 일으킨 대지의 자국을 환영처럼 그려내며 불꽃 마져도 그들의 의지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검은 그을음'이나 '불꽃'이나 그들의 예술적 창작의지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단지 TROIKA는 그들이 그려낸 화풍을 평가하기만 할 뿐이었다. 

3작품은 절대적으로 과학적 논리에 의해서 형성된 결과임에 틀림없다. 다시, 그들의 수다는 관자의 공감을 얻으며, 무한 행진을 시작하고 있었다. 톱니바퀴같은 움직임이, 빛의 진로가, 줄이 폭포를 그리는 뻥같은 이야기들는 그들의 믿음에 힘입어 착각의 환영처럼 그렇게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과학적 근거와 시도 없이는 결코 만들 수 없는 행위임을, 스스로 인정하며 공감을 제안하고 있었다.

빛이 앉아 있다. 언제부터쯤인지 그 시각을 확인할길 없이 오래 전부터. 원형 분리기를 통과한 빛의 과정이 한눈에 보여준다. 내려 오고 올라가고 중력의 원칙을 망각한 빛의 행진이 나열된다. 

사진가에게 빛은 그 진로가 파악된다. 사진가에게 낯익은 인공광이 그 빛을 발생하며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스트로보광의 찰나적 행위는 그것을 분류하는데, 사진가의 단련된 시각이 그것을 읽어낸다. TROIKA는 그것들의 생성 경로를 보여주며 그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한 여성이 작품 앞에서 멍하니 서있다. TROIKA가 보여준 영상 때문이었다. Small Bangs 시리즈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우리의 속담을 비웃고 있었다. 보이는 것이 진실임을 알았고 그렇게 믿고 살았던 우리의 인식을 방해하고 있었다. 알고 있는 것과 보는 것을 분리하여 보여주고 있었다. 단순하게 우리는 그냥 보는 것과 알았던 진실을 질타하며, 생각의 근육을 단련시키고 있다. 

카메라는 간단 명료하다. 세상의 모든 소리도 '찰칵'이라는 동일어로 받아 적는다. 0과 1의 원리처럼 단순하게 사진의 생성원리를 이해하고 있었던 나에게 사물들끼리의 다양한 대화를 들려주며 그들만의 언어를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우리는 단순한 과학적 근거에 의해서 그들간의 잡음으로 이해한 건조한 논리를 그들의 음성이라 말하며 감성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사진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며 프레이밍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들어 주듯, Electroprobe는 숨겨진 비밀을 발설하며 인식하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공존하지 못함에 문제가 제기된다.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 황폐화로 인도하듯, 테크놀로지를 감성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예술로 승화시켰다. 트로이카는 기술을 질문화법을 통하여 상상과 인지적 예술세계와 접목시키는데 성공했다. 시각적 환영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환영을 권하는 전시라고 자평하며  전시장을 나섰다. 결코 혼자가 아닌, 또한 사진과 접목된 새끼치기적 상상 속에서 나 자신에게 창작적 욕구를 거세게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대림미술관, 트로이카(TROIKA)를 만나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