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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휴 칼럼/Photo Essay

첫눈 오늘날, 어느 시골 풍경 속으로...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첫눈이 왔다. 봄바람난 처녀 가슴처럼 싱숭생숭하여 기차를 타고 떠났다. 차창밖의 풍경을 감상하랴, 재미에 빠진 르네상스 미술책보랴 정신없이 시골풍경 속으로 빠져드는데 순간이동되었다. 칼바람도 결코 차갑지 않았다. 왠지 모를 정겨움들이 나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밭 한귀퉁이에 대여섯마리나 되는 강아지들이 어미와 놀구있고, 비닐하우스에서 아낙이 일을 하고, 담벼락에 매달아 놓은 시래기까지 고향 풍경을 만끽하기에는 충분했다.  

비닐 하우스가 많은 동네, 마을 뒷편으로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고즈넉하다고 해야 할까. 어미 품에서 노니는 강아지들이 포동포동하다. 누가 볼쎄라 어미는 새끼를 돌보느라 노심초사하다. 놀아주랴, 지켜주랴 바쁜 나날들이지만 행복해 보인다. 개들에게는 표정이 없다고들 하지만 귀여운 강아지와 새끼들을 사랑으로 감싸는 온화한 표정이 역력했다.

낙엽은 지고, 높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는 큰 풀들이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고 있었다. 누런 색깔을 한 마른 잎과 가지가 석양의 노을을 먹금은 듯 더욱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비닐하우스너머 발악하는 석양, 비닐을 거둬낸 자리에 듬성 듬성한 그물망이 지나가는 나를 불러 세웠다.

아낙에게 비닐 하우스는 타인들이 바라보는 것과는 다르다. 온 몸을  바쳐 자식들을 뒷바라지 하던 일터이자 위안이었다. 직업병처럼 비닐하우스를 떠나면 불안하고 앉아 있으면 편안한 그것. 사진을 찍으러 다가가자 뭘 찍을 게 있느냐고 말하며 흔쾌히 수락했다. 밝게 웃는 모습이 긍정 이상의 무엇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일까? 나를 버리고도 온전한 웃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힘이 존재하고 있었다.  

빛은 세상을 새롭게 재단한다. 음식의 조미료처럼, 아니 천연 조미료의 역할처럼 맛깔나게 풍경에 대한 입맛을 돋군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앙상한 나무가지가 비닐하우스를 지키고 있었다.

이름이 필요하지도 않다. 산등성이를 넘어가던 석양이 옹기종기 모여앉은 들풀들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신비로운 느낌처럼 잔잔하게 스며들며 나의 렌즈를 덮쳤다.

담벼락의 시레기는 농부의 마음으로 매달려 있었다. 추운날 속을 따뜻하게 해주며, 술꾼들에게 해장으로 그만인 시레기국. 그렇치, 시골의 담벼락에는 이게 있어야 시골 스럽지.

깡통이다. 가을내내 밭에서 곡식을 지켜줬던 그 깡통소리, 이제는 할일을 마친 그는 휴가중이었다. 

노을이 노란 빛을 하고, 배추밭에 내려 앉았다. 텃밭 끄트머리에는 수로가 지나고, 주인 잃은 시골집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먹금고 말없이 있었다. 텃밭의 배추는 김장을 담궈 도심에 있는 자식들에게 먼저 보내고 남은 짜투리들일게 틀림없다. 이제는 당신들이 먹을 김장을 담그려는 듯...

나는 촌놈이다. 시골이 고향이라는 것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아무리 휘황 찬란한 도심의 기운도 고향 땅의 기운을  넘어설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왔고,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순리때문일 것이다. 묵묵히 말없이 자연의 기운을 품고 있는 그 아우라가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한 도심이라도 어찌 그 문턱을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시골, 아낙, 강아지, 텃밭, 석양, 끄트머리, 비닐하우스, 시레기. 셀 수 없을 만큼의 단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단어 하나에는 존재하는 것들이 단어 이상이다. 삶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존재하고, 다시 현재의 기억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도 수직선상에 놓는다. 과거의 기억은 언급한 단어에 이끌려 들어간다. 단순하게 비닐하우스와 아낙이 어릴적 동네에 살았던 비닐하우스 속의 아낙을 의미하고 있지는 않다. 부엌에서 일하시던 어머니의 얼굴과 일들이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고흐의 구두처럼 보이는 표피적인 부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농부의 고단함과 농촌 아낙들의 애환이 담겨진 것처럼 의미와 단어 하나에도 허투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급했던 단어들은 시골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시골은 그곳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에게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그 기억들이 뇌리를 스치며 온전히 기억 속에서 살아난다. 

도시가 고향인 사람들에게 어린 시절은 상상의 나래일 뿐이다. 어린 시절 놀았던 그곳은 건물들이 들어서고 온데 간데 없는 상상의 고향! 고향이 시골인 촌놈들에게는 지금도 그곳이 존재한다. 그 실질적 존재는 생활세계와 맞닿으며 다시 그 시간 속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자연은 복원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같은 나무 같은 풀들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재생시켜 주는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연이라는 보통명사를 고유명사로 받아들이는 조건은 그 현장이 보존되어 있어야 가능하다. 그림 속의 의미로는 그 감정을 동일시하지 못한다.

시레기라는 단어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그릇에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아침밥을 먹으며 그날의 할 일들을 나누는 정겨움이 담겨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기억까지도 새록새록하다. 그 분들의 떠 오르는 얼굴 속에는 장날 손잡고 따라 다녔던 기억과 그 분들의 잔칫날의 흥겨움도 존재한다. 

그러나 말하는 단어는 텍스트로 전환된다. 그것으로도 시간여행은 가능하다. 그러나 더욱 강력한 것이 이미지이다. 이미지중 제일 활성화된 것은 사진이다. 사진이라는 사실성은 신뢰를 할 수 있으며, 과거의 존재를 만나기에 더욱 강력하다. 사진을 찍으며, 찍은 사진으로 글을 쓴다. 글은 내면에 잔잔하게 가라앉은 기억까지도 끄집어낸다. 인터넷의 검색어처럼 강력한 도구이다. 사진으로 어디든 떠날 수 있다면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현대인에게 행복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상은 존재에 대한 사유를 갈망하는 욕구를 채우고자 끄적인 나의 사유의 파편들이다.


첫눈 오늘날, 어느 시골 풍경 속으로...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