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진을 통해 촬영자를 분석한다. 사진 속의 단서를 찾아 촬영자의 성향을 기술하는 형식이다. 사진은 지향하는 것을 찍는다. 지향하는 것은 바라보는 것이자, 그 곳에 자신이 존재하는 원리이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그를 말할 수 있다. 그럼 그림은 어떨까? 사진은 외형의 내면화이고, 그림은 내면의 외현화라고 말한다. 물론 사진이나 그림이나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많은 사진가들의 사진을 분석하며 자신감을 얻는 나는 이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격을 분석하고자 한다. 단 모나리자에 관련된 이야기와 그림의 내용만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전체적인 맥락으로 기술한다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고 나는 사진작가일 뿐이기에 수다형식을 빌어 이야기에 책임을 지지 않는 방식을 택한다. 가뜩이나 살기 힘든 세상에서 남의 뒷담화를 들으며 마음 상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빈치의 그림과 행적을 보면서 너무 신격화된 그의 위상에 대해 반론도 재기해 볼까 한다.
사실, 내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한 평가에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신비주의라는 베일에 쌓여있는 불확실한 근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근거를 제시한 모든 평가자들의 말들도 정답은 아닐 수 있다. 우선 모나리자의 그림에 나타난 단서에서 그의 우유부단, 두루뭉술한 성격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당대의 화가 중 보티첼리의 <봄>, <비너스의 탄생>과 같은 그림은 명확한 선으로 그림을 그린 반면 다빈치는 스푸마토라는 기법을 창안하며 구렁이 담넘어가듯 그려냈다. 그것은 새로운 기법이라기보다는 그의 성향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이 그를 나타내듯 그의 스푸마토기법, '흐릿한', '자욱한' 이라는 뜻과 같이 그의 성향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 모나리자에 나타난 웃는 것도 마는 것도 아닌 일명 '천년의 미소'라고 미화된 표정을 들 수 있다. 모나리자가 가지고 있는 감정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 아닌 어중간한, 보는 사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판단하기 힘들게 하고 있다. 작가의 의도란 주제에 맞게 그것을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하거늘 그런 원칙을 망각한 'different'적인 발상을 시도하고 있다. 작품은 메시지를 담아야하고, 모나리자라는 여인을 통하여 전달하고자하는 의미가 담겨야 하지만 다빈치는 몽환적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셋째, 그가 주문을 받았다는 모나리자의 작품이 주문자에게 죽는 그날까지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린다, 못그린다는 답변도 없이 그가 가지고 다니면 계속 덧칠하며 수정해 온 것도 그의 성향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요즘 같으면 인터넷에 도배되어 왕따 당하기 일쑤다.
결론적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세상과 단절된, 자신과의 소통에 몰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가 다양한 것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 사물에 대한 본질을 알아가기 위한 수순이었을 뿐이다. 지금 저승에서 사람들의 평가를 들으며 비웃고 있을 게 틀림없다. 세상사람들에게 그의 천재성을 과시하며 스스로의 자존을 뽐내고 있을 것이다.
그의 말년이 불우함도 그의 이런 성향때문이 아니었을까?
모나리자를 통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격분석.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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