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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휴 칼럼/Photo Essay

포도밭에서의 존재를 논하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눈은 사진이 보이는 대로 보려한다. 하긴 이게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만 보면 세상이 금방 식상해진다. 그 안에 잠재된 것을 찾아내야 한다. 할머니의 옛 이야기에 익숙해 있던 우리에겐 이야기만한 게 없다. 그건 잡담이라도 좋다. 포도밭에 얽힌 생각들을 풀어보려 한다.

정면에 피사체를 넣는 것은 초보적 사진찍기의 전형이다. 맞다. 나의 아들이 찍은 사진이다. 의인화하여 찍되,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지 말고 의미를 부여하라는 주문을 했다. 더불어 다양한 위치에서 촬영할 것도 주문했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중간이다. 미래는 가능성이고, 과거는 흔적이다. 흔적은 보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흔적이 더욱 매력적이다. 없는 것을 찾아낼 수 있는 전지전능한 파워를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니깐. 이곳은 포도밭이다. 사진의 중앙에 선 주인공이 나다. 내가 들어간 사진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의미부여라기 보다는 해석의 영역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포도밭에 두엄을 내고 있다. 아들이 고향에 내려가도 빗자루 한번 잡지 않던 내가 두엄을 내고 있다니 천지개벽할 노릇이다. 포도밭에 두엄은 일단 잡풀이 나지 않고 겨울을 나는데 좋다. 또한 굵은 알을 만들어 내기 위한 농부의 기대이기도 하다. 농부는 좀 더 굵은 포도송이의 수확을 통하여 양이 아닌 질로 승부를 걸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오랜 경험을 토대로 포도송이를 솎아내는 일부터 자연산 퇴비를 활용하여 단맛을 증가시키고, 양질의 상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망을 씌워 놓고 완성도 높은 상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고랑에는 검정비닐이 밭관리의 편리성과 보온을 유지하는데 한몫을 한다.

들판은 보이는데로 봐서는 안된다. 들판은 농부의 피땀과 오랜 세월 내려왔던 터전을 봐야 한다. 밤과 낮에 다녀갔던 짐승들과 바람, 그리고 뜨거운 햇살과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포도밭을 씌운 그물망은 반복된 새들의 공격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야생동물들을 출입을 막기위한 울타리도 쳐진다. 자연과 나누고자 하는 배려가 없음은 인간과 자연사이의 교감이 잘 이뤄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봄이면 새싹이 돋아나고 여름이 되면 풍성한 잎들이 농부를 햇살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다. 고랑에는 산들바람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닥아줄 것이다. 굵고 실한 열매를 위해 어린 송이를 솎아내는 번거로움과 생명을 걷어내야 하는 죄의식이 교차할 것이다. 밤이며 야행성 동물들이 꽃향기와 포도익는 향기를 맡으며 주위를 배회할 것이며, 그 움직임에 가슴조일 것이다. 그 긴장감은 포도를 더욱 탱글거리게 만들어 줄 것이다. 자연은 자연스럽게 윤회가 이뤄진다. 사려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사라짐에 대한 인간의 철학적 사유와 형이상학적 발견 없이도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그 옛날, 포도밭은 산이거나 돌밭이었다. 인간의 힘으로 조성된 유용한 공간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의미는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은 대지의 역사이며, 인간과의 교감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들판은 과정과 목적이 하나다. 둘이 아닌 하나임은 과정에 충실하지 않은 결과는 없음을 의미한다. 포도밭은 나에게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잉태하며 또 다른 가을을 준비한다.


포도밭에서의 존재를 논하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