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의 '기다림'은 이메일의 등장과 동시에 사라졌다. 스마트폰 속에 네비게이션, 오디오, 카메라를 집어 넣었다. 스마트폰이 없는 일상은 앙꼬없는 찐빵이다. 노래가사는 물론이고, 가족들의 전화번호도 잊어버린지 오래다. 편리함 속에 모든 것이 사라졌다. 사라짐은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감정까지도 'dellete' 중이다.
"교묘한 조작과 유희, 수정, 이미지 재생의 모든 가능성은 '아날로그' 세상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이것은 또한 모든 긴장감의 종말이다. 이미지는 찍는 순간 그 장면과 함께 거기에 있다. 정말 말도 안 되게 뒤죽바죽이다. (반대로 폴라로이드 카메라에서 이미지가 느리게 순차적으로 나타나는 일은 그 얼마나 경이로운가!) 디지털적인 것에서는 바로 이 나타남의 시간이 없다." <사라짐에 대하여> 장 보드리야르.
저자, 장 보드리야르는 추억 속에 잠겨있다. 빠름보다는 느림을, 그리고 기다림에 대한 설렘을 즐긴다. 폴라로이드에서 상이 맺히는 광경을 기다릴 수 있는 아날로그를 좋아한다. 사라짐을 논하고 있지만 부정적이진 않다. 사라짐은 없음이 아니라 생겨나는 계기를 제공한다. 쉬운 책은 아니지만 '사라짐'이란 단어의 기대감으로 계속 읽힌다. 사라짐 너머에 존재하는 존재의 궁금증, 사진과 관련된 이야기가 시선을 끈다. 저자는 아날로그의 환상을 즐기며, 디지털을 사라짐의 주범으로 몰아 가고 있다. 장 보드리야르에게 아날로그는 사춘기 소년에게 이성을 바라보는 눈길처럼 뜨겁다. 디지털의 삭제보다는기다림 속에서 느끼는 인간적인 면을 좋아한다. 무작정 찍을 수 있는 디지털의 자유를 포기하고 필름의 손맛을 잊지 못하고 있다. 'dellete'키의 관용은 풍요와 더불어 권태를 선사했다.
사라짐은 비움이다. 채울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여유로운 공간 속에 집어 넣을 수 있는 세상을 기대하는 것이다. 어느 덧, 나도 사라짐에 대한 향수에 젖는다. 카메라에 필름을 끼우며 가졌던 설렘을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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